본문: 느헤미야 4:7-14
제목: 영적전투는 언제나 치열하다.
서론)
지난 주간에 섬겼던 DPA 5기 사역 때, 강의를 마치고 질의 응답하는 시간에 강의에 참여한 목사님이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쳇 GPT AI 시스템을 이용하여 설교 준비하지 말라 하셨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책을 읽을 만한 시간도 많지 않고, 읽으면 졸리고 그러니 쳇 GPT를 이용하여 설교 준비를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대단히 유용한데 사용하지 말라 하니 불편합니다. 제 의견에 대한 견해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질문한 목사님이 이렇게 제게 다시 질의를 한 이유는 제가 강의했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날 강의한 원고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책은 남의 인생입니다. 강연도 남이 얻은 통찰입니다. 남의 것을 읽고 들어서 기록할 수는 있지만 기록만으로 그것이 내 것을 체화되지는 않습니다. 실체가 있는 변화 성장을 원한다면 직접 해야 합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과 머리를 직접 써서 얻는 산 경험이어야 합니다.” (이정훈, 『쓰려고 읽습니다.』, 책과 강연,p,123.)
“〈책과 강연〉 대표이자 북 콘텐츠 기획자인 이정훈이 글에 남긴 사족이다. 그의 글을 읽고 설교자에게 더 없이 좋은 촌철살인이라고 생각해 밑줄 그었다. 세속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글을 읽고 쓰는 지성들의 수준도 이 정도다. 하물며 영혼을 책임지는 목회자가 내 것이 없는 빈집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인가! 이렇게 말하면 반론이 만만치 않겠지만 특수한 스펙트럼에서 조망한다면 다음의 말은 틀리지 않는 토로다. 목사는 설교를 위해 태어난 존재다. 딴지 걸지 말자, 변명하지 말자. 이 말이 맞다. 그렇다면 목사는 설교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공부해야 한다. 목사는 놀 시간, 없다.”
질문을 한 목사님이 앞에서 말한 대로 제게 도전적으로 질의를 했기에 답을 해야 했습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 책을 참고하거나 집중해서 준비를 못하신다면 쳇을 이용하십시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챗이 만들어준 설교문은 소름을 끼치게 할 정도로 정확한 설교문을 완성하여 제공하지만 그 글에 기름부음은 없습니다.”
목회라는 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나 삶의 방법론을 교우들에게 주입시키거나 교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철저하게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는 사역입니다.
사정이 이러기에 목회라는 영역은 언제나 대단히 긴장감 백퍼센트입니다.
이 영역은 영적인 전투가 시분초마다 벌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긴장감을 놓으면 패배합니다.
반면 영적 긴장감이 충만하면 목회 현장에서 야기되는 일체의 영적 전투에서 이깁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지금 말씀 드린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성서적으로 알려주는 대단히 좋은 텍스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북쪽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 산발랏과 예루살렘 동쪽에 있었던 암몬 지역의 실력자 도비야가 느헤미야가 진행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악하게 분노하며 심리적인 방해에 들어갔음을 지난 주일설교를 통해 살폈습니다.
이런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주저함 없이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에 박차를 가하자, 반대 세력들의 방해는 한층 더 강화되기 시작했음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이 구절이 시사하는 영적인 교훈에 대해 민감하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더 늘어났음을 보고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공격과 더불어 이번에는 예루살렘 남부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 게셈이 주도하는 아라비아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서쪽 지역에서 상당한 기득권적인 혜택을 보고 있던 아스돗 사람들까지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확산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지형적으로 접근한다면 느헤미야는 이제 동서남북에 포진해 있는 적대자들에 의해 포위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설교를 통해 보았던 성벽 재건 반대자들의 행동은 심리적 전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이제는 심리적인 전술을 뛰어 넘어 물리적인 힘을 동원할 태세임을 보여줍니다.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이 구절에 ‘치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라함’은 군사적인 도발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요란하게 하다’라고 번역한 ‘토아’는 ‘동요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종합한다면 적대세력들이 느헤미야와 예루살렘 성벽 재건자들에게 이제는 말이 아니라 힘을 통해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셈입니다.
적대자들이 자행하려고 하는 이런 군사적인 압박에 몰린 예루살렘 성벽 재건자들은 극도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10-12절을 살피겠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육 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이 구절 안에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한 세 가지의 패배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① 자포자기의 무력함입니다.
성벽을 재건하던 유다 백성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것이 흙무더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성벽은 튼튼히 석재로 쌓아올려야 하는데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 근처에는 돌들이 아니라 흙더미가 더 많은 지형이라 성 쌓기에 역부족이었음을 암시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이면적인 이유는 흙더미 때문에 성 쌓기도 쉽지 않아 기진맥진인데, 적대세력들의 압박과 군사적인 침공이라는 겹겹의 공포가 밀려왔기에 유다 백성들은 스스로 이제 우리는 힘이 다 빠져서 성벽재건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자포자기의 무력함이 밀려왔음을 알려줍니다.
② 두려움 즉 공포심이었습니다.
적들이 군사적으로 공격하면 우리는 물론 우리 가족들도 살육을 당할 것이라는 극도의 공포심이 유다 백성들을 급습했습니다.
③ 내부분열입니다.
적대자들이 포진해 있는 동서남북 근교에 성벽을 쌓고 있는 유다 백성들의 불안은 더 컸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혹시나 모를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느헤미야에게 집요하게 요청한 것입니다. 더불어 근교 성벽을 쌓고 있던 자들에게 가족들은 성벽 중수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안전하니 성벽 재건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이중의 압박이 느헤미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었습니다. 중앙의 수비적인 리더십이 와해되면 전체가 와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대적들이 노린 수가 중앙의 리더십이 무너지는 것이었기에 아팠지만 더 더욱 느헤미야는 이런 적들의 속셈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로 하는 리더십만을 발휘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 9절과 13절에서 그는 대단히 탁월한 행동하는 리더십을 선언합니다.
먼저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이어서 13-14절입니다.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9절에서는 단순히 파수꾼들만을 조직하여 만에 하나 일어날 일을 대비했던 느헤미야는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13절에서는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대를 조직하여 배치합니다.
느헤미야는 단순히 말로 안심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이런 행동하는 리더십을 근간으로 동요하고 있고 불안에 떨고 있으며 무기력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 다시 영적인 힘을 북돋아 줍니다,
14절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의 이런 철저한 리더십의 극치가 9절과 14절에서 나타납니다.
대적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리더십의 총아는 이 싸움을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과 이 믿음을 본인뿐만이 아니라 유다 백성들에게도 저변 확대했다는 점입니다.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자고 역설한 것은 느헤미야가 갖고 있는 영적 리더십의 극치였습니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유다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적들에 대한 방어 및 준비에 최선을 다하도록 했습니다.
믿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만사형통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에 만전을 기하며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아무리 이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영적 전투에 대해 승패를 가늠한 최종 권위자임을 믿고 하나님을 기억하자고 백성들을 독려하며 엎드렸던 것입니다.
‘기억하라’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문자적으로 ‘향을 피워 냄새가 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순간적으로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몸에 냄새가 배일 정도로 흠뻑 도취되어 느끼는 기억을 말합니다.
부연한다면 느헤미야는 적들이 공격이 아무리 맹렬하고 노도와 같이 무섭더라도 전혀 기죽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내 몸에 배일 정도로 기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분임을 각인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 해석을 통해 치열하게 곱씹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영적 전투 현장은 치열하기에 긴장해야 합니다.
사사기 16:25-2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삼손이 맞이하게 될 최후 직전 순간입니다.
다곤 신전에서 행하는 큰 제사가 블레셋 사람들에 진행되던 장소에 두 눈이 빠진 상태로 삼손이 끌려 나왔습니다.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을 많이 죽인 원수 삼손에게 재주를 부리게 함으로서 다곤 축제에 흥을 더 돋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다곤의 신전에 끌려 나온 삼손은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 형식을 띤 다곤 신전의 큰 기둥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있어야 했기에 놀림감이 되기에 좋은 표적이었습니다.
이런 수모를 당한 삼손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사사기 16:28절입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무엇이 보이십니까?
비장함이 보이지 않습니까?
긴장감 100%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삼손이 하나님께 드린 이 기도를 접할 때마다 화가 치밉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왜 이 비장함을 나실인으로 부름 받아 사명을 감당할 때 견지하지 못했는가의 유감 때문입니다.
아주 좋았던 나실인 시절, 삼손의 인생 이력을 살피면 이렇습니다.
“여자, 여자, 여자를 외치며 살았던 비루한 인생이었다. 하나님이 부른 영적 긴장감 0%의 참담한 인생이었다. 영적 긴장감과는 담 쌓은 인생이었다.”
이것이 삼손의 이력서입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말로에 서서 드디어 긴장감을 찾은 삼손을 보면서 동정이 아니라, 그래도 마지막에 하나님이 삼손의 원수를 갚았다고 박수쳐주는 말도 안 되는 얄팍한 동정심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는 화남이 제게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 있는 교우들 중에 삼손과 같은 아류들이 즐비하다는 점에 어떤 때는 목사로서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어 곤혹스럽습니다.
지금 본인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너무 잘 되고 있습니다.
만사형통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가정, 직장, 범사로 인해 감사의 조건이 넘친다고 생각하는 기막힌 신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 영적 긴장감 0%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2:16-20절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 그대로입니다.
부자의 토로는 행복지수 100%입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8-19)
그러나 이렇게 영적 긴장감 0%의 부자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어지는 누가복음 12:20절은 보고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에서 배제된 승리는 승리가 아님을.
하나님의 이기게 하심이라는 영적 긴장감이 배제된 승리는 껍데기임을.
하나님이 내 삶을 통치하지 않는 잘 됨은 신기루임을.
누구도 예외의 영역은 없습니다.
누구도 열외 되는 신앙의 군사는 없습니다.
민수기 9:20-23절을 읽겠습니다.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이 구절을 읽다보면 마음이 쨘 해집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구름이 움직이는 대로 이동했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는 대로의 순종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문제는 구름의 이동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들쭉날쭉은 물론 시간의 변동성도 다양했음을 알려줍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로 하여금 번-아웃을 시킬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구름의 이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한 가지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긴장감입니다.
구름의 이동에 대해 지쳐 이스라엘 공동체가 머뭇거리거나 불순종했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결코 입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매일의 시분초를 긴장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무엇을 오늘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합니까?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으로 긴장했던 그 긴장감이 가나안으로 갈 수 있었던 바로미터였다는 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애비로서 할 말이 지천입니다.
아무리 꼰대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백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가지를 추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아들의 결혼에 즈음하여 권면한 것은 기실, 아버지라는 위치보다는 목회의 선배로서 주고 싶었던 이야기이기에 하나의 메시지로 줄여 편지를 썼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들아, 영적으로 긴장하는 목회자로 서 주기를 바란다. 영성적 지성이 있는 목회자로.”
아들이 목회할 현장보다 더 치열한 현장은 없을 것 같기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내 안에 혹시 무너져 내린 성벽을 건축하려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탄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신앙의 성벽이 재건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영적인 산발랏, 도비야, 게셈, 아스돗 사람들이 치열하게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해가 아무리 크다할지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주군께서는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영적으로 긴장하고 있느냐! 입니다.
바라기는 세인 지체들은 이번 주간도 영적인 전투가 한참인 여러분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이르고자 하시는 승리의 조명에 민감해서 결코 영적 전투에서 패하지 않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의 이름 송축하리/주의 이름 송축하리/지존하신 주의 이름 찬양
거룩하신 주의 이름/거룩하신 주의 이름/거룩하신 주의 이름 찬양
영광스런 주의 이름/영광스런 주의 이름/영광스런 주의 이름 찬양
후렴)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루/그곳에 달려간 자 안전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