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3:1-5
제목: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2)
서론)
대학 학부를 다닐 때 역사학자 E,H CARR가 남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교수가 내준 숙제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군사독재 시절, 학습되고 세뇌된 머리를 가졌기에 역사에 대한 문외한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이후에 몇 번 더 도전했지만 역시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건진 이 문장만큼은 제 목회와 지성적인 성장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이렇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E.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 p,50)
카의 이 갈파가 왜 나를 뒤 흔들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대단히 단순하지만 제게는 너무 중요한 연속의 과정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연구하는 과정도 카의 갈파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대기 역사서라고 하는 느헤미야를 읽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는 두 개의 역사 기록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신명기 역사서이고, 또 하나는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전자는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하여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등 총 6권을 말하는데 포로기 이전의 역사를 보고하는 이 역사서는 5번째 율법서인 신명기에 나타난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하고 기술했기 때문이라고 신명기 역사서라고 지칭합니다.
반면 역대기 역사서는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총 4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역사서의 특징은 포로기 이전과 이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명기 역사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민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 패망을 한 가장 치욕적이고 충격적인 비극을 경험하고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비극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도대체 이스라엘은 누구인가?(WHO), 이스라엘은 무엇인가?(WHAT)를 재정립하는 데 사활을 걸었고, 이것을 토대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추스르려 한 것이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이런 정황을 전제로 기록된 역사서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느헤미야서이기에 우리의 시도는 무너져 내린 이스라엘 선민공동체의 회복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느헤미야서를 읽어야 합니다.
카의 말대로 느헤미야 역사서 저자가 역설하고 있는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을 소통하는 자세로 본문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황이 이러하기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벽 재건은 철저하게 준비했고 무서우리만큼 목적 달성에 집중하고 있음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에 양문 성문을 수축이 아니라 새롭게 건축함으로 제사 즉 예배의 회복을 무너져 버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회복의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고 판단했던 느헤미야의 의지를 살폈습니다.
본문은 양문 건축을 시작으로 또 다른 문들의 수축이 이루어졌고, 그 수축의 일을 맡은 자들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 그룹들에게 양문 건축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양문을 수축한 제사장 그룹은 연이어 예루살렘 성 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수축되어야 하는 두 곳의 망대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함메아와 하나넬 망대였습니다.
‘망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미그달’은 영어성경에는 tower 즉 탑으로 번역했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단(壇)이 높여진 상태’를 말하는 단어이다 보니 이 망대 역시 제사를 드리는 어떤 상징적인 장소로 추측됩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 그룹에게 양문을 건축함에 있어서 부차적으로 제사와 관련되어 있는 또 다른 처소들을 수축하도록 위임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재 강조하지만 1절은 얼마나 느헤미야가 제사 회복에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2-4절을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여리고 사람들과 이므리의 아들 삭굴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을 도와 양문 그리고 함메아, 하나넬 망대 수축을 도왔다고 기술합니다.
주목할 것은 바사 통치시대인 본문의 시대를 전제할 때 여리고는 유다 지역의 북동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에 공사 현장에서 거리적으로 대단히 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그들이 솔선수범하여 성벽 재건에 동참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성벽 건축이라는 프로젝트에 유다 전 지역의 백성들이 같은 마음으로 사역했는지를 알려주는 보고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 기자는 연이어 역사적 사실을 보고합니다.
3-4절에서 양문을 기점으로 시계 반대방향에 위치해 있었던 어문을 수축한 자들의 명단이 보고됩니다.
하스나아의 자손들과 므레못, 므술람, 사독 등이 이 사역을 감당했다고 보고합니다.
이들이 수축한 문을 어문(魚門)이라고 부른 이유는 이곳에서 어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보고합니다.
이제 오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5절을 나누겠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구절은 오늘 설교를 통해 눈여겨보아야 할 구절입니다.
‘드고아’라는 지명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예언자 아모스 때문입니다.
아모스 1:1절을 보면 드고아는 아모스 예언자의 고향임을 알려줍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이 드고아는 베들레헴 남동쪽에 위치해 있는 소읍입니다.
두 개의 그림을 소개합니다.
그림 1) 드고아의 위치
그림 1에서 보는 것과 같이 드고아는 염해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드고아의 위치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림 2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림 2) 산발랏, 도비야, 게셈의 영향 아래에 있던 지역 분포도
이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는 의미는 드고아라는 지역이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5절의 기록에 나름 이해가 됩니다.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느헤미야 프로젝트에 대한 드고아 지역에서 일어난 분열적인 양상을 설명해 줍니다.
대체적인 드고아 사람들은 느헤미야 프로젝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성벽 재건에 호응하였지만, 드고아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느헤미야 프로젝트를 부정적으로 보아 성벽 재건에 참여하지 않은 부류임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조그마한 소읍인 드고아에 왜 이런 분열이 있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의 소형근 박사의 주석으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드고아 지역의 귀족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비협조자들이었다. 왜 이들은 느헤미야 사역에 비협조적이었을까? 드고아라는 지역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통치 지역과 매우 근접해 있었다. 따라서 드고아의 귀족들은 게셈의 영향 가운데 있었거나, 게셈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5절은 드고아 지역에서 느헤미야 개혁에 동조하는 세력과 비협조하는 세력이 공존했음을 알려준다.” (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느헤미야”, 대한기독교서회,56.)
정치적인 역학구도로 인하여 피해 입는 것을 싫어했던 드고아 지역의 귀족들은 주인(야훼 하나님, 혹은 느헤미야)의 공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셈입니다.
우리는 오늘 설교의 레마 구절인 5절을 보면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 언제나 하나님의 사역에 반대자는 존재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레마를 전제할 때, 설교의 제목은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승리는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하게 합니다.
앞으로 보게 될 4-6장에서 느헤미야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려는 반대 세력들의 준동들이 얼마나 크고 치열했으며 거셌는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 그림자의 여운이 본문 5절에 기록된 드고아의 귀족들입니다.
드고아에 살고 있었던 귀족들은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일을 무시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역대기 역사서의 목적인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정체성 확립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에 이들은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소위가 얼마나 반 이스라엘적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귀족’이라고 번역된 ‘귀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디르’의 문자적인 의미는 ‘힘 있는’ 혹은 ‘돈 있는’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드고아 지역의 권력과 재력을 거머쥐고 있었던 자라는 말입니다.
정치학적인 용어로 빌려 말한다면 드고아 지역의 부르조아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 이스라엘의 정체성 회복 등등의 언어들은 조금도 이익이 되는 단어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개혁이 되어 세상이 바뀌면 본인들의 기득권, 갖고 있는 권력과 재력이 흔들릴 수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적용해도 큰 틀은 바뀌지 않습니다.
언젠가 주일 설교를 통해 친구 목사의 고민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강남 3구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고민입니다.
“이 목사, 내가 아주 가끔 목사인가를 묻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성경적인 정신과는 정 반대되는 메시지를 원고에 담아 전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정말로 내가 싫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나이에 교회를 개혁할 수도 없고, 해도 안 될 것이 분명하기에 전혀 복음적이거나 성서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회중들의 귀에 달콤하게 만들어 설교라고 이름 붙여 전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한심하기에 그지없기에 고통스럽다. 계속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이 치욕이다.”
이 토로가 어찌 친구만의 고민과 토로이겠습니까?
펜데믹 3년 동안 한국교회의 상황은 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해도 그 일에 끔쩍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땅에도 드고아의 귀족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주목하고 또 주목할 것은 느헤미야의 리더십입니다.
느헤미야는 드고아 귀족들의 방관과 무시함 그리고 심지어 반대하고 거부하는 일에 대하여 조금도 괘념치 않았습니다.
역사가의 본문 기록만 보더라도 대단합니다.
본문에 느헤미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성벽 재건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나가는 자들의 이름 75명과 15개 분야와 지역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단 한 부류, 드고아의 귀족들만이 동참하지 않았다고 치부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을 무시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반대자들에게 주목하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에 대한 자신감과 응원하심을 분명히 믿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자들에게 적절한 기도제목이 이어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우리에게 넘치는 물질이 있지 않은 것도 복이요, 활력 넘치는 완전한 건강이 있지 않은 것도 복이요, 내 가정과 범사의 현장에 적절한 문제가 있다는 것도 은혜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완전함과 넘침과 건강함은 도리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대적거리임을 인식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승리는 우연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과정 중에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것을 믿는 자들의 믿음이라는 콜라보레이션이 합쳐질 때 승리는 임합니다.
우연한 승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론)
지난 주간에 김영봉 목사의 글을 읽다가 밑줄 그은 부분이 있어 나누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김 목사께서 인도하는 소그룹 성경공부 반에서 경험한 목회 일화를 책에서 소개합니다.
성경공부 반원들이 나눔을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 자리에 있던 자매가 자기 순서가 오자 이렇게 말을 받았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해서 문제인가요? 저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 분명한데 그 뜻에 순종하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제게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해요. 그런데 저의 이기심이 저로 하여금 그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무척 괴로워요.” (김영봉, “그 사람, 모세”, 복 있는 사람, 119)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인지 확실히 몰라 하나님의 선한 사역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까?
정말입니까?
혹시 내게 별로 유익이 되지 않는 일이라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명심하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반대편이 아닌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을.
저는 우리 교우들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는 필연적인 승리의 사역에 동참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승리는 우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 내십시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와 함께 라면
주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참된 부요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유혹하려고 세상바람 휘몰아 쳐 와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어 자비로운 주의 음성을
주와 함께라면 병 들어도 좋아
참된 강건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넘어뜨리려 거친 파도 휘몰아 쳐 와도
나는 결코 놓을 수 없어 따사로운 주의 손길을
내 맘 아시는 주 항상 함께 계셔
약한 내 영혼에 위로와 능력주시네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시련의 밤 어둡고 깊어도
나는 결코 떠날 수 없어 아름다운 주의 나라를
주의 나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