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5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57) : 성탄절 설교 본문: 히브리서 13:16-19 제목: 성탄절 이후 살아내기 서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교우들 전부에게 임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분열과 반목의 시대를 뚫고 평화가 곧 길임을 시사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이 땅에 편만하게 임하는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진 한 장 보겠습니다. (그림 세팅 설명) 어제 드렸던 새벽송 사역에 교우들의 가정에 전해 드린 성탄 카드입니다. 1면에 실린 성경 구절이 이렇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1) 이 카드는 시중에 있는 문고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주문한 것입니다. 주문한 이유는 시중에 있는 문고에서는 이런 성탄 카드를 구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구절이나, 아기 예수님의 그림이 있는 성탄 카드는 이렇게 교회가 특별하게 주문할 때나 구입할 수 시대가 되었습니다. 본말이 전도되고 주객이 전도된 오늘 성탄절의 자화상입니다. 이렇게 주인이 배제된 성탄절을 보낸 지도 이미 오래이지만 금년에는 그 헛헛함이 더 한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2022년 성탄절을 맞이한 우리 교우들이 성탄절 이후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다른 성탄 본문을 굳이 선택하지 않고 우리가 보는 히브리서 본문을 통해 그 내용을 찾아볼까 합니다. 본론)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라는 소중한 설교문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읽고 듣는 자에게 몇 가지를 당부합니다. 1) 교회 밖으로 나눔이라는 善 행하기를 중단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본문 16절을 읽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저자의 당부에서 크게 보이는 점은 나눔이라는 선을 행하기를 제사라는 가치와 동등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무엘상 15:22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해 보십시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여기에 기록된 ‘제사’라는 70인 역의 단어와 히브리서 본문의 제사와 같은 단어인 ‘튀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튀시아’는 일반적으로 ‘제물’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희생 제물’ 즉 오늘의 단어로 의역한다면 ‘예배’를 상징하는 단어로도 사용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나눔이라는 善은 곧 예배다. 대단히 중요한 성찰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배보다 중요한 신앙의 가치는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역설한 16절은 성탄절을 맞이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곧 이 나눔을 善 행하기로 연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언자 미가를 통해 예언한 메시아 탄생 장소에 대한 실현을 보고하는 마태의 보고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묵상할 때 다시 한 번 각인해야 하는 성찰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 小村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에 비해 베들레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변방이었습니다. 심지어 동방박사들도 제일 먼저 유대 땅에 도착하여 방문한 곳이 예루살렘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베들레헴은 전혀 세간의 주목 대상이 되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베들레헴을 주목하게 된 것은 궁정 서기관들과 대제사장이 말한 해석 이후였습니다. 바로 이 정황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탄생에 대한 영적 의미를 새겨야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하고 당연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곧잘 놓치는 더 중요한 부분이 있어 새겨볼까 합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행태입니다. 이들은 예언자 미가에 대한 정보를 너무 익숙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보는 탈 베들레헴, 친 예루살렘의 행보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하여 무관심하던 저들은 영적인 무감각과 무딤 그 자체의 대명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끄는 유대 종교는 당연히 소외된 자들 즉 상징적으로 베들레헴의 민중들과는 결별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몰라서 친 예루살렘 성향에 함몰되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했다는 점입니다. 돌보아야 할 자들에 대한 의도적 무시였습니다. 반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소촌이며 기득권자들에게 외면당하던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무시당하던 자들이 있었던 곳으로 관심이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의 예수 사역의 의미를 살피겠습니다. 성장하신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이라는 시간을 이 땅에서 보내시면서 철저하게 갈릴리 중심의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에서 사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이동하셨던 공간적 장소는 사마리아와 데가볼리 지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유대의 기득권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불온한 지역, 불순분자들이 우글거리는 접근 불가의 지역이었습니다. 더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에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다시 찾으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는 베들레헴이라는 탄생지와 더불어 사셨던 생활공간 속에 또 하나의 변방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다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와 성도의 삶은 당연히 오늘 우리 주변의 변방에 주목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변방에 거주하는 자들을 향하여 나누고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성탄 절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행하여야 하는 삶입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눔은 많은 것을 갖고 있기에 행하는 자선 사업이 아닙니다. 족하지 않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나누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성탄절, 세인 공동체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정신이자 사역입니다. 2) 교회 안으로는 사역의 리더십을 존중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도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설교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 메시지를 담아둔 이유는 아마도 배교를 하려는 자들이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무례함을 질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왜 저자는 이렇게 주후 60년 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에 대한 리더십을 강조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을 하자면 히브리서를 쓰고 있는 저자를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지도자일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런 문구가 나오면 성직의 계열이 있는 그룹은 좋은 텍스트라고 호재를 부르기 십상입니다. 목사에게 잘 하라고 국한하면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하면 안 됩니다. 17절에서 언급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은 성직의 그룹에 있었던 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히브리서를 작성하고 있는 그룹에 속한 일체의 일반 성도 모두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오늘처럼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분하고 있는 체계로 해석하거나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 전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더 큰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17절에 기록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저는 답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가 이미 살폈던 히브리서 13:7-8절을 다시 복기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적어도 히브리서 저자가 함께 사역하던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었던 리더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그리스도에게 붙들려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에게 붙들려 있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치욕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려 있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근래 교회가 약해진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리더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상실한 것이고, 또 다른 한 부류는 그것을 빌미 삼아 교회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자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의 절기에 다시 한 번 우리 세인 교회가 마음과 정신을 곧추 세워야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리더들이 주께 온전히 붙들려 있는가에 대한 성찰과 멤버십들은 주 예수께 붙들려 있는 그 리더의 권위를 존중해 주고 있는가에 대한 집요한 각인입니다. 주님께 붙들려 있는 리더들은 공동체의 지체들을 위해 이렇게 삽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을 부지런히 살피며, 하나님의 엄격한 감독 아래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히브리서 13:17절 중반절)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자들은 또 이렇게 반응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고단한 심정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지도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들을 힘들게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메시지’ 17절 하반절) 우리를 위해 오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 분이 핏 값을 주고 사신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세운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위해 존중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3) 나와 영적인 관계의 끈을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18-19절을 읽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는 독자들에게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도 요청의 이유로 우리들이 행하려는 일체의 사역이 선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아마도 주후 60년대에 살고 있었던 로마 근교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배교를 막고 영적인 연대를 통해 더 굳세게 하나 되기를 원하는 바람으로 기도 요청을 한 것으로 사려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내가 너희 공동체에 빠른 시간에 방문하여 너희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이기도록 기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알 수 없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임한 위기를 목도하고 있는 리더로서 아픔을 전하며 빠른 시간 내에 직접 방문하여 그대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기도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기도의 연대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도의 연대는 지금 이 시대에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영적인 길벗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최고의 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만 하는 행동으로 연대하는 것은 그리 신뢰할 만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이라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영혼의 호흡인 기도로 연대하는 행위는 신뢰할 만한 최고의 신앙적 행위입니다. 빌립보서 1:3-8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이 고백한 빌립보 교회 교우들을 사랑의 밀어가 시작된 기초는 기도의 연대였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과 기도의 연대를 이루었던 바울의 사랑 고백의 절정은 이렇게 고백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얼마나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시다.” 그 유명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살펴보십시다. 요한복음 17:21-22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절정 부분입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기도의 연대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 됨이 주제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는 아니지만, 제가 아는 교우 한 분이 제게 이런 문자를 남겼습니다. “목사님, 참 이상해요. 다른 기도를 할 때는 안 그런데 목사님을 위해 중보 할 때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이유를 모를 정도에요.” 저는 다른 교회를 섬기는 지체이지만 그 성도의 진정성을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역시 그 성도를 위해 중보의 끈을 놓지 않는 기도의 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요일, 기공예배를 드리기 위해 청주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 전도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새벽에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목사님의 절규에 저 또한 목사님의 사역과 교회 학교 사역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데 눈물이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연대입니다. 마크 뷰캐넌이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몸을 둥글게 틀고 들어가야 할 자궁이다.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성시키는 어둡고 밀폐된 공간, 적막이 흐르는 공간이다. 기도는 배배 꼬여 엉망으로 뒤얽혀 있는 우리의 이기심과 고집스러움을 한 오라기 한 오라기 풀어내서 우리 심령 안에 성령의 역사를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짜 넣는 곳이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p,364.) 그렇습니다. 한 자궁 안에서 거주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고집스러움을 박살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대신 채워놓는 것이 기도인데 어찌 그 기도로 연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성탄절기, 그냥 상투적인 성탄 요절에 맞추어 앵무새처럼 또 들었던 말씀에 길들여지지 말고 예수께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바울이 또 그렇게 실천했던 것처럼 공동체를 위해 기도로 연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귀한 성탄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정호승 작가의 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남자가 연인의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나야, 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돌아가라, 이 집은 너와 나를 들여놓는 집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곳을 떠나 몇 달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연인의 말을 곰곰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다시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이번에는 ‘너야, 너’라고 말했다. 그러자 금방 문이 열렸다.” (정호승,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해냄, 187-188)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당신과 내가 하나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이번 성탄절 이후, 우리는 이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것을 필요한 자와 함께 나누는 삶의 예배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함께 걸어주는 교회 안의 리더십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기도로 연대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십시오. 페루의 시성인 세사르 바예흐의 말대로 당신과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