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3:9-15
제목: 대강절 살아내기 (4)
서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교우 여러분!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끝까지 그리스도인답게 주어진 말씀을 잘 붙들고 살아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목사로 살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설교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한때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며 청년 부흥의 불을 지폈지만 지금은 사역의 일선에서 탈락된 모 목사가 항상 집회 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목사들이 설교 준비가 힘들다는 말은 꾀병입니다. 설교 준비처럼 신나고 행복한 일이 또 없습니다. 게으른 목사들이 공부 안 하고 어리광을 피우기 위해 상투적으로 행하는 말이 설교 준비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생각의 다름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이런 발언은 정말로 목사를 두 번 죽이는 것과도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교 4학년 시절에 신약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을 오롯이 기억합니다.
⓵ 신학생 시절에는 가능한 설교를 하지 않도록 해라.
⓶ 신학생 시절 때는 주석을 보지 않고 설교 원고를 작성해라.
왜 선생님께서 이런 지침을 주셨는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설익지 않은 자가 설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체의 사역은 위험하기 그지없기 때문임을 교육하신 것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설교가 쉽다고 말하는 치들을 보면 대화 불가입니다.
히브리서 강해 사역을 진행해 온지 이제 1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시작하면서 개진했듯이 히브리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성경 중에 탑 랭크에 올라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1주부터 시작하여 56주가 되는 오늘까지 단 한 차례도 해석이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마무리를 할 때 즈음이면 이런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꿈인 듯합니다.
히브리서는 끝까지 설교자를 괴롭힐 정도 깊은 성찰과 해석이 동반되지 않으면 대단히 어려운 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매일반입니다.
본문을 교우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본문 읽기와 주석 연구, 그리고 참고 단행본 독서를 한 주간 끊임없이 행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 난제의 본문을 만났습니다.
설교자가 정말로 힘들게 본문 해석을 정리했으니 교우들은 예의를 갖추고 경청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본론)
먼저 오늘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분에 관한 최신 이론에 이끌려 그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유일하고 충분한 기초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인 온갖 상품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시는 제단이, 안에서 횡령과 부정 이득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 오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옛 제도 아래에서는 짐승을 죽여 진 밖에서 그 몸을 처리합니다. 그 후에 그 피를 안으로 가져와서, 죄를 위한 제물로 제단에 바칩니다. 예수께서도 똑같은 일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희생의 피를 쏟으셨고, 그 흘리신 피가 하나님 제단에 드려져 백성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밖으로 나갑시다. 예수께서 계시는 그곳,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그곳으로 나갑시다. 특권을 누리며 안에서 안주하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예수께서 받으신 치욕을 우리도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안에서 안주하는 사람의 세상’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장차 다가올 도성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밖에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성경 본문 텍스트에 비해 상당히 의역을 한 내용들이 보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대단히 선명한 복음 이해를 준 유진 피터슨 목사의 번역이기에 조금 길지만 본문 전체를 다시 읽어드렸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자들을 향해 본문 9절에서 쐐기를 박는 듯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텍스트입니다.
다른 교훈이 무엇일까?
이렇게 질문한 저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뜬구름 잡듯이 갑자기 음식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난제 구절입니다.
해서 성서학자들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합니다.
“갖가지 이상한 가르침과 그것에 이어 곧바로 나오는 음식으로써 마음을 굳게 함 혹은 음식으로써 행함이 어떤 관계일까? 히브리서 설교자와 청중들에게 골칫거리였던 여러 신학적 문제 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문제가 대표적인 문제였을 것 같다. 그 문제의 내용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유대교 음식법,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이방인과 유대인의 공동식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조재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히브리서”, 홍성사, 217)
이 주석에 대해 조금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교우들에게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좋은 실례가 고린도 교회 공동체일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4-6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교회 안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지식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8:5절에서 고린도 지역에서 횡행하던 우상숭배의 대상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린도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들은 우상들을 ‘많은 신들’(many gods), ‘많은 주들’(many lord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표현한 신과 주를 소문자와 복수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지식인들은 그것(우상)이 하찮은 존재, 별로 의미를 주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평가절하 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 한 분 외에 세상에 있는 여타 많은 우상들은 아무런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대단히 긍정적이고 복음적인 해석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지식층에 속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런 지적인 믿음을 근거로 이렇게 접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특별히 고기를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접근 말입니다.
틀리지 않는 접근이지만 그들의 이런 행태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떤 파장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 8:7-12절에서 바울이 그 파장을 적시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바울이 이들의 행태에 대해 주의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믿음이 약한 자’들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전 축제에 사용된 뒤에 뒤풀이로 함께 먹는 고기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섭생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의 지식을 굽히지 않는 이들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 혹은 이교도였다가 기독교 믿음으로 개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 신자들이 저들의 음식 섭취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에 대해 지식인들이 섬세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7-12절에 담겨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반론을 제기한 것은 믿음이 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를 행하라는 강력한 권고였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리처드 헤이스는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약한 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이교도였다가 회심한 이방인들이었기에 그들은 이전에 ‘우상에 관한 습관’을 가진 자들이었다.”(리처드 헤이스, “현대성서주석-고린도주석”, p,247)
이렇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주후 1세기에 상당히 중요한 논쟁거리 중에 하나가 바로 음식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독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앞서 고린도공동체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하찮은 것이기에 자유롭게 먹었던 지식층과는 반대쪽에 있었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그 음식을 먹음으로 시험에 빠진 내용을 소개했지만, 히브리서 본문의 느낌은 그 반대입니다.
유대 율법적으로 금기시 하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는 고집이 낳은 음식 논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음식의 율례를 지키는 것으로 종교적인 원칙을 지키려는 자들을 향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일갈한 것입니다.
9절 다시 한 번 복기합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음식이라는 비 본질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대체하지 말라는 경종이었습니다.
이렇게 경고한 저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본색을 나타냅니다.
10절 이하에서 은혜를 소개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들을 진 밖에서 처리했고, 이후 그 피를 갖고 성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음을 상기시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예수께서도 성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시며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서 인류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완결판 피가 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렇게 역설한 저자는 이윽고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본문 13절은 강력한 은혜의 울림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이 부분을 번역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밖으로 나갑시다. 예수께서 계시는 그곳, 중요한 알이 벌어지는 그곳으로 나갑시다. 특권을 누리며 안에서 안주하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예수께서 받으신 치욕을 우리도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안에서 안주하는 사람의 세상’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더불어 14-15절에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우리는 장차 다가올 도성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밖에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메시지 히브리서 14-15)
쉽지 않은 본문 이해를 마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해석된 말씀 이해를 근거로 대강절 살아내기 4번째 주간의 레마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 ‘안’에서의 부여 받은 은혜를 토대로 ‘밖’이라는 현장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나타내는 복음의 전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절)
“성문 밖에서” (12절)
대강절 4번째 주간, 세인 교회 지체들의 시선은 ‘밖’에서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정체성입니다.
‘안’에서 만족하는 삶은 우리들의 영적 기상도를 비만으로 만드는 암적 요소입니다.
‘안’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말했던 헬몬 산으로 추측되는 변화산상에서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9:5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하지만 베드로의 요청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이어지는 마가복음 9:7절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극단적 상징을 마가는 이렇게 기술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의 자리는 현장입니다.
교회 안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삶의 자리에서 주군이 당하셨던 고난에 동참하며 그 분이 이 땅에서 행하시려고 했던 일체의 일들을 실천하며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내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상식을 존중하는 교회’입니다.
담임목사가 이 표어를 설정하면서 주제절로 어떤 구절을 정할까 내심 고민하다가 결정한 말씀 구절이 누가복음 10:37절입니다.
율법교사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건넨 영생 논란 담론에서 예수께서 율법 교사들의 저의가 아주 나쁘다는 것을 알고 무대 위에 올린 비유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율법 교사들에게 던진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사장, 레위 사람, 선한 사마리아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물으셨습니다.
카운터펀치를 맞은 율법 학자들이 마지못한 대답한 것은 자존심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에둘렀습니다.
끝까지 소위(所爲)가 악한 저들을 보면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한 메시지가 누가복음 10:37절인데 저는 이 구절을 내년도 우리 교회 표어 절로 설정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7 2f)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신 행위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행했던 그 일을 가서 똑같이 행하라고 하명하신 장소가 성전 안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장소는 율법 교사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대강절 4번째 주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그 아름다웠던 행보를 위임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하는 것은 ‘안’이 아니라 ‘밖’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한희철 목사께서 쓴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내가 머문 자리가 나를 닮았기를” (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29)
단 하나의 문장인데 읽다가 오금이 저렸습니다.
한 목사가 남긴 이 글은 절대로 함부로 쓰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문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세간의 사람들이 내가 머문 자리에서 악취가 난다고 여긴다면 나는 정말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좋을 뻔 최악의 인생을 산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어떻게 랜덤으로 산 자가 이런 선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남에게 보여줄 때, 나를 닮아 있는 자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대강절 4번째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헬몬 산상 위의 황홀경이 너무 아름다워 초막을 짓고 있습니까?
당장 헐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산 밑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 받고, 양육 받고, 은혜를 공급 받으십시오.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후에 교회 안에 머물지 마십시오.
성문 밖에서 고난의 피를 흘리신 주군처럼 교회 밖으로 나가십시오.
산지를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밖’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게 여러분의 삶을 말씀에 걸맞게 살아냄으로 하나님 백성임을 선언하십시오.
지금은 내 삶의 정황이라는 ‘밖’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내는 자가 절실할 때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주님이 주신 땅으로 한걸음씩 나아갈 때에 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큰소리 외치며 나아가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