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레슬리 뉴비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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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서로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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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09-11 21:1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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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의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 쉬는 소망”, (서로 사랑 간)을 읽고 기독교 철학자 강영안 교수는 최근에 출간한 ‘읽는다는 것’에서 유학시절, 당시 유명한 선교사이자 학자인 레슬리 뉴비긴과 사적인 만남에서 가졌던 뜻깊은 한 일화를 소개한다. 레슬리 뉴비긴에게 강 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이십니까?” 그러자 뉴비긴이 이주 강한 어조로 대답했단다. “아니요, 나는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참고로 뉴비긴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은 강 교수가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왜죠?” 그러자 뉴비긴이 강 교수에게 잊지 못할 말을 건넸단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강영안, “읽는다는 것”,IVP, p,22.) 여기까지가 강영안 교수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는 소위 말하는 뼛속까지 개혁주의의 보수성을 견지하는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자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반색하며 답한 이유 때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레슬리 뉴비긴의 그 말을 곧바로 십분 이해했다고 술회한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라는 단말마적인 외침이 이 소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기만 하지, 읽은 말씀대로 전혀 살지 않아요!” 서평자가 레슬리 뉴비긴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미 오래다. 그의 걸작인 ‘타당한 확신’(SFC 간)을 읽으면서 대단히 지적이며 균형 잡힌 선교 신학자로서의 영적 자존감을 만났다는 것 때문에 흥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진보주의적인 색깔의 논평들이 짙게 깔린 책들을 접하다보면 이성적인 이해, 날카로운 지성, 해박한 해설들을 접하기는 하지만 반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영성의 허전함과 아쉬움을 항상 느낀다. 이에 반해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근본주의적 냄새가 지독한 책들을 접하면 시간 낭비를 했다는 속상함 플러스 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힘이 빠진다. 이런 차제에 ‘타당한 확신’,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IVP 간)의 레슬리 뉴비긴의 균형적인 선교신학자의 탁월한 혜안을 보여준 작품을 만난 것은 내게는 행운이었다. 이후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IVP 간), ‘교회란 무엇인가?’ (IVP 간), ‘성경 한걸음’ (복 있는 사람 간), ‘죄와 구원’ (복 있는 사람 간) 등등은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영성적 의지를 견고하게 만들어준 수작으로 남아있기에 언제나 레슬리 뉴비긴은 본받고 싶은 신앙의 선배다.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 쉬는 소망”을 손에 들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전에 그의 책을 읽을 때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물 흐르는 듯한 수월함이 다가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독서의 내공 없이 덤벼든 주변의 사람들을 아는데, 그들의 이구동성의 소회는 가볍게 여긴 것에 대한 회개였다. 읽기가 대단히 어려웠다는 보고를 첨부하면서. 그도 그럴 것이 뉴비긴을 이해하려면 대체적 신학의 이해도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본서는 뉴비긴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적 근간을 소개한다. 1-3장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시작으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비밀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와 함께 하는 삶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장 바른 방법 즉 신학적 보편성을 뿌리로 설명한다. 동시에 4-6장은 20세기 선교신학자 본 과학, 타종교, 그리고 복음의 현장인 광장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 뉴비긴이 본서에서 제시한 눈에 띄는 중요한 몇 가지의 교훈들을 나누고 싶다, 성삼위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논하면서 저자가 소개한 내용은 오늘 우리들도 담아야 한다. “예배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예배가 10시 30분에 시작해서 12시에 마친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예배에 잠시 참석할 뿐이다.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내내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예배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p,33) 예배에 대한 경직성, 상투성, 현장화, 그리고 제약당하는 예배를 고집하는 개신교 예배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그리스 정교회 예배에 참석했던 뉴비긴이 토로해 낸 말이다. 직전 교회는 아주 전통적인 하이어라키에 찌들려 있던 교회다. 평자가 청빙을 받아 갔을 때, 제일 먼저 부딪쳤던 것은 예배 시간에 대한 고정화였다. 11시에 시작한 예배는 12시 정각에 끝나야 한다는 고정관념 말이다. 그 근거는 질서의 하나님은 이렇게 준비된 예배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무장하여 몰아쳤다. 예배 속에서 강물같이 흐르는 성령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강제로 제한하는 무지는 예배를 예배답게 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삼위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적인 수단으로 제약하지 않으려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준 높은 영적 가치를 뉴비긴은 부러워했다. 이제 대단히 민감한 성육신하신 예수에 대하여 뉴비긴은 거침없이 토로한다. “18세기 유럽의 지성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등을 돌리고 합리적인 세속주의라는 새로운 신앙을 택했는데 이와 동시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다. 계몽운동과 함께 생겨난 진보의 개념으로 인해 사람들은 과거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예수는 진정 누구였나?’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그 그리스도 아니라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았던 그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소위 ‘역사적 예수’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보여주는 예수가 아닌 실존했던 모습 그대로의 예수의 모습을 제시하는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일견 이러한 추세는 교만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p,36)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들으면 벼락 맞을 만한 위험한 발언에 뉴비긴은 거침이 없다. 뉴비긴은 교만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역사적 예수’ 에 대한 연구를 쓰레기 취급한 근거를 CS 루이스의 말로 대변한다. “사람들의 교만함을 ‘연대기적인 속물근성’이라고 비판했다. 단지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과거에 살았던 이들보다, 심지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소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나서기 때문이다.”(p,37) 저자는 이렇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본인의 해석을 분명히 한다. “역사적 예수는 믿음의 그리스도다. 역사적 예수는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역사적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그리스도요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한 주이시오, 주 외에는 다른 분이 없다.”(p,58) 대단히 고리타분하고, 맹목적인 예수주의자로 비판받기에 십상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뉴비긴이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본인의 소회를 보인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즉 성육신하신 예수 때문이다. 나를 찾아오신 믿음의 주체는 예수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평자는 뉴비긴의 주장에 지지를 표한다. 성육신하신 예수라는 뉴비긴의 주장을 평자는 이렇게 바꾸려고 한다. 내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기가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다. 나는 예수를 성경에서 만난다. 그런데 더 엄청난 감동은 그 예수께서 책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뚫고 나오셨다. 그리고 내 삶의 현장으로 뛰어드셨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전율하는 은혜와 감동을 체험한다. 그 분은 내 삶의 갈릴리에 계신다. 그곳에서 역사적 예수로 일하신다. 놀라운 기적과 감동의 감동은 그 갈릴리 예수가 내 삶 안으로 파고 드셔서 나에게 주를 계신다는 점이다. 그 분은 분명 갈릴리에서 일하셨지만 내게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주님으로 여전히 계신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선명한 성육신이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뉴비긴을 지지한다. 일견 갈릴리 예수에 천착하는 자들에 대하여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뉴비긴과 내가 다른 점이다. 나는 갈릴리 예수를 존중한다. 그것은 그 분의 역사적 정체성이다. 하지만 그 분은 갈릴리에 계시는 분이지만 나에게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주님으로 성육신하신다. 신비요, 은혜요, 감동이요, 기적이다. 나는 레슬리 뉴비긴의 이 점이 좋다. “역사적 예수는 믿음의 그리스도다.” 언젠가 교우들에게 피토하는 심정으로 전했던 내 설교 제목이 갑자기 떠오른다. “갈릴리에서 산 그리스도 예수” 믿거나 말거나. “과학을 별개의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을 수학공식처럼 표현할 수 있을 따름이며 과학은 우리 지식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p,104) 과학을 신으로 섬기는 오늘,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945헥토파스칼의 위력보다 더 강력한 초대형 태풍들이 연이어 한반도를 강타해서 넉 다운을 만들고 있다. 미국 서부는 대형 화재로 인해 우리나라 면적과 비슷한 산림이 잿더미가 됐다. 덴버는 하루 차이에 기온이 33° 가 떨어져 더위와 추위가 하루 사이에 경험되는 말도 안 되는 시대말적인 자연 재해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신흥 종교인 과학은 속수무책이다. 왜 그럴까? 과학은 해답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신이다. 대체할 신이 없다고 믿는 이 시대는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를 않는다. 저자는 또 다른 일면을 논하고 있다. “근대성, 근대화라는 불리는 것은 세속 종교다.”(p,111) 저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교회가 근대화라는 종교에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교회는 매순간 소위 근대 사상에 순응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결국 근대화라는 거짓 종교에 맞설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중략) 근대화는 지난 2000년 역사를 통틀어 교회가 맞닥뜨린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pp,114-115) 저자는 근대화를 논했다. 신흥 종교의 메카로 근대화를 논했다. 저자의 글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부분은 이거다. 지금은 근대화 이후 시대를 넘어섰다. 근대화라는 시대의 테제가 ‘호머 사피엔스’로 명명되었다는 것을 평자는 안다. 헌데 오늘의 테제가 무엇인가?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오늘은 ‘호모데우스’의 시대다. 인간이 하나님인 시대는 인간의 외장도구들을 향상시키던 차원의 시대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업그레이드하거나 혹은 그 외장도구들과 직접 통합하는 방식의 시대로 급격히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루었다.” (박일준, “인간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동연 간, p,128.) 쉬운 말로 풀자면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한 전단계적인 과학의 시도라는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래서 과학이 만들어내는 호모데우스 시대의 어두운 전망을 이렇게 내놓았다. “우리의 기술공학이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re-engineer)하게 되는 대, 지금까지 규정해 왔던 호모사피엔스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인간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위의 책, p,129) 레슬리 뉴비긴이 본 영적 안목과 그 혜안이 탁월해 보인다. 그는 말한다. “과학과 근대화라는 종교는 오늘 우리들이 직면한 괴물이다.” 이제 북리뷰를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런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믿음의 선배다. 그가 평생을 사랑했던 인도 선교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어떤 영향력을 제시해야 하는가를 몸소 삶으로 보여주었던 신앙의 거인이었다. 그가 책에서 이런 사족을 남겼다. “힌두교를 믿는 친구들은 내게 종종 ‘왜 굳이 예수만을 고집하는가? 예수가 수많은 위인 중에 한 사람이었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를 묻는다. 이 이 질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를 부르셨고, 때문에 나는 증거 할 수밖에 없다,”(pp,124-125) 오늘 이런 거인이 필요하다. 어디에 있는가? 이 땅의 레슬리 뉴비긴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코마에 빠져들었다. 산소 호흡기를 떼며 곧바로 사망선고가 내려질 정도로 중증이다. 부인하고 싶지만 소생 가능성이 그리 희망적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책 말미에 레슬리 뉴비긴이 내놓은 이 한 문장이 왠지 모르게 죽어가는 자를 벌떡 일으킬 충격파처럼 여겨져 가슴에 새겨본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회에 복음에 기초한 이해의 틀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회에 대한 복음의 영향력은 기독교 정당 설립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와 만물과 모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 성령께서는 새 창조를 경험한 성도들을 부르사 그리스도를 위해 사회의 모든 부분을 취하고, 사회 곳곳에 복음의 빛을 비추며 세상의 숨겨진 거짓을 드러내라고 명하신다. 근대화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 교회가 부르짖었던 그것을 이제 교회가 다시 부르짖어 사회에 응집력과 방향성을 제시하고 대중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pp,149-150)
서재에 꽂혀 있는 레슬리 뉴비긴의 여타 남은 책, 네 권 (‘아직 끝나지 않은 길’- 복 있는 사람 간,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IVP 간, ‘오픈 시크릿’- 복 있는 사람 간,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SFC 간) 이 탐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나를 흥분시킨다. 9월은 책 읽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100번을 양보하여 코로나 19의 장점은 서재에 짱(!) 박히게 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