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2024-06-11 09:54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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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이정일
ㆍ출판사 예책
ㆍ작성일 2020-11-21 21:28:22

 

이정일의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예책 간, 2020년)을 읽고


필자는 가끔 너무 좋은 책을 만났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공부를 하게 해 준 책을 만나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한 동안 멍하니 감동의 코마에 빠지곤 한다.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책이 그런 주인공이다. 책 속에 담겨 있는 금과옥조와 같은 글말들이 무궁무진해서 무엇부터 주워 담아야 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한 보물과도 같은 책이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이다. 늦은 봄에 팀 켈러가 쓴 ‘하나님을 말하다’를 읽고 너무 행복했었는데, 늦가을 녘에 또 다시 전율하는 감동을 자아내게 한 이정일 작가의 본 책의 여운은 그리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프롤로그를 읽고 울기는 처음이다. 저자는 그렇게 필자를 울렸다. 그가 신학을 한 작가라서 그런가! 묻고 또 물었지만 아니었다. 내가 운 이유는 오늘의 교회 자화상을 너무 잘 그려준 교회에 대한 저자의 천박하지 않은 애틋함과 아림의 짝사랑 때문이다. 이런 감동의 이입과 성찰은 그가 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적인 소양을 상당히 질 높은 기독교 신앙관으로 승화시켰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필자가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364페이지 양장본은 오늘처럼 책읽기를 싫어하는 시대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거들 떠 보지 않는 부류의 패착을 던진 셈이다. 필자도 처녀로 발간한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동연 간, 2016년)을 무슨 배짱으로 320페이지나 만들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의 364페이지를 읽으며 숨죽였다. 그리고 이런 감정까지 치올랐다. 조금 더 썼으면, 조금 더 길었으면….
프롤로그의 소제목이 ‘문학은 신앙의 땅 밑에 흐르는 강물과 같다.’이다. 문학이 수준 높은 신앙적 도반의 여정에 얼마나 엄청난 도구가 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선전포고와 같은 무게감을 준 문장이다. 정말 저자의 선언은 적확했다. 책 전반에 흐르는 문학과 신앙의 상관관계는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그 도구가 시요, 소설이요, 그 밖의 문학적 자료들임을 저자는 천명한다.
필자는 2018년, 두 번째 책인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를 출간했다. 너무 당연히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책에 대한 시놉시스를 링크해 놓았다. 필자가 김기석 목사와 글벗이 된 이유는 그는 갖고 있는 문학적 지성의 자양분들을 언제나 신앙적으로 귀하게 적용시켜 나를 전율하게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필자의 블로그에 게재한 이 시놉시스에 익명의 네티즌이 거의 독설에 가까운 어휘들을 동원하여 김기석 목사를 난도질하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도 필자에게 한바탕 훈계까지 남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김기석 목사에게는 성령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에게 속지 마시라. 그리고 그의 사탄적인 정체를 분명히 알라”고 경고까지 하면서.
기독교의 공공성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더불어 숲 교회를 섬기는 이도영 목사가 최근 쓴 글에 이런 갈파가 담겨 있다. 
“기독교는 자꾸 기독교내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메시지를 현대 사회의 공론의 장에 통용될 수 있는 공적 언어로 변역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문제점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도영, “코로나 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새물결플러스, 2020,p,43.)
100% 동의한다. 왜 교회가, 왜 기독교인들의 시각이 좁아지는 것일까? 인문학적인 스펙트럼에 대해 눈감거나 외면하기 때문이다. 외통수는 급진적 근본주의로 빠질 수 있는 개연성을 제공한다. 해서 이청준이 소리쳤던 ‘당신들의 천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또 다른 조백헌을 양산한다. 이것을 알았던 저자는 이렇게 일갈한다.
“신앙인이 자신의 민낯과 생각의 빈곤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자기 자신에 대하 무지, 인간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p,7)
이렇게 도전함으로 시작한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은 읽는 내내 맥박이 100을 뛰게 했고, 혈압도 상승하게 하고, 그 무엇보다도 심장을 타격했다. 아, 그러나 염려는 마시라! 필자가 살아 있으니.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저자의 글 마당은 각 장마다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학을 통한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이다.
상투적이지 않다. 촌스럽지도 않다. 더 더욱 교리적이지도 않다. 우격다짐은 단언건대 없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한 것은 인위적인 그와의 만남을 가공하여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때문에서일까? 필자는 저자가 제시한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라잡이로 이 책을 누구에게나 소개하리라는 전도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나 북-리뷰가 너무 길다는 핍박이 심해 글쓰기에 조심하는 편인데, 저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몇 가지는 분명 그들이 또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열거한다.
“살다 보면 삶에 이끼가 낄 때가 있다.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시대라서 삶의 기술이 조금만 무뎌지면 경험 많은 목회자라도 성도를 인간이 아닌 사역의 대상으로 보는 잘못을 범할 위험이 있다.(p,20)
얼마 전, 존경하는 친구 목사가 인도한 세미나에서 그가 전한 울림이 나를 공명했다.
“목사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면 목회의 문을 닫는 것이 옳다.”
두렵고 떨리는 시금석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어록을 저자는 소개한다.
“25세에 이미 죽었는데, 장례는 75세에 치른다.”(p,142)
내 목회가 이런가에 소름이 돋는다. 내 삶이 이런가에 경기(驚氣)를 한다. 나에게 야박하자. 무섭도록 매몰차자. 그러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릴지 모르니까.
“기독교의 매력 중에 하나는 철저한 불합리성이다.” (p,70)
통쾌했다. 그리고 아멘 했다. 합리적인 것에 아멘 하는 것은 이성이다. 이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성 너머에 언제나 계시지만 그 너머에서 나를 이성적으로 만들어주시는 주군임을 나는 믿는다. 그렇다 나는 안다가 아니라 나는 믿는다가 나를 겸손하게 한다. 내가 기독교 택한 이유는 바로 필자 또한 철저한 불합리성 때문이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좋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이 성취되는 시간 사이엔 약간의 기다림이 있는데, 그 시간이 진짜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p,94)
재독학자 한병철은 이렇게 현대인들을 비평했다.
“조급성의 시대는 산만의 시대다.”(한병철, “시간의 향기”, 김태환역, 문학과 지성사,2013년,p,106.)
코로나 19로 인한 전무했던 타격을 받은 지금의 목회자들과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아마도 산만한 조급함이 아니라 기다림일 수 있다. 저자가 전해준 이 교훈은 깊은 내 심연에 자리 잡고 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말을 들어보자.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 (p,148)
작가의 한 마디에 오금이 저려온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단언하지만 주께서 우리에게 명명하신 것은 너는 빛이다, 너는 소금이야 라는 단발마적인 정체성 부여였다. 문제는 빛이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는 데 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어둡다면 과연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근래, 날마다 복기하고 또 복기해보는 필자의 질문이다. 제발, 교회가 팔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교회가 싸구려 상품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회퍼는 이것과 싸우다가 죽었는데, 우리는 지금 교회가 싸구려 상품이 되는 것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오싹하기까지 하다.
매일 하는 기도가 있다.
“목사는 전한 말씀대로 살게 하시고, 성도는 들은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세인의 새벽에 날마다 올리는 기도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말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권세다.”(월터 카이저,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 새물결플러스, 2011년,p,99.) 
고든 콘웰 신학교 총장을 역임한 월터 카이저의 토로는 교회가 어둠보다 더 어두워진 작금을 뒤돌아보며 새겨야할 금언이다.
결핍을 지독히 싫어하는 시대가 지금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것을 역전시켜야 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당위의 공동체다. 문제는 교회가 결핍을 더 못 견뎌 하는 아픔이 더 아프다는 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핍은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p,257)
촌철살인으로 담았다. 비우는 것을 가르쳐주는 공동체가 교회이고,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결핍이라는 선생이다. 혹시나 교회가 너무 가진 것이 많아진 것을 아닐까 싶어 조직교회에서 목회하는 나는 섬뜩해질 때가 많다.
동시에 나는 목사나 성도나 아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는 아딧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저자의 一說이 크게 와 닿는다.
“아름다운 삶이란 금수저의 삶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려고 눈물짓고 아파하면서 애쓴 흔적이 있는 삶이다.”(p,266)
예루살렘 성전으로 절기를 지키려 올라오던 200만 명의 유대종교인들 중에는 두 종류의 부류가 있었다. 고향에서 애지중지 키우며, 사랑했던 양과 소와 비둘기를 고생 끝에 가지고 온 사람이 한 부류고, 또 한 부류는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서 성황리에 판매하던 싱싱한 제물들을 돈 주고 산 부류들이다. 언제나 종교적 타락의 발화점은 영악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캐나다의 뉴라이프 커뮤니티의 담임목사로 섬기는 마크 부캐넌이 쓴 책 제목이 ‘Your God is too safe.’라는 도전적인 역설의 제목이다.
이렇게 믿기를 종용하는 오늘의 교회는 희망이 없다. 이렇게 믿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코마로 누워 있는 식물인간과 별 다름이 없는 무능력한 존재다. 이들에게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의 하나님은 이미 관심 제로다.
뷰캐넌은 말한다,
“우리는 돌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 생활 속으로 돌진해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호출할 때까지 천천히 배회하면서 멀찍이 안전하게 걸이를 유지해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후원하면서 다만 멀리서 지켜보시기를 원한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2005년, p,121.)
실은 깜짝 놀랐다. 이런 책을 규장에서도 발간했다는 사실에.
또 너무 길어졌다. 그래도 한 가지만 더.
신학을 공부했지만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을 감당한 저자는 속내를 드러냈다.
“적용이 시작되는 곳에서 설교도 시작된다.”(p,201)
챨스 스펄전의 말을 인용한 저자는 불편한 진실을 상당수의 독자들이 목회자라는 것을 전제하며 공격적 방어를 목적으로 다음의 글을 썼다.
“설교란 설교문을 준비해서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준비하여 그를 전하는 것이다.”(p,202)
좌의정을 네이버로, 우의정 다음으로, 영의정을 유트브로 삼고 있는 나 같은 목사를 좌절하게 하는 저자의 독설이 내일이 주일인데 강단에 서는 것을 맹폭한다. 언제나 삶을 설교할까 싶어 깊은 고민에 빠진다.
북 리뷰에 넣고 싶은 것이 어디 이뿐이랴 싶지만, 서평 자체도 길어 읽지 않을 것 같아 멈추려고 한다, 단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미주를 살폈다. 저자가 남긴 인용 서적이 약 200여권이다,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그가 200여권을 읽을 때, 24권만을 건졌으니 말이다. 물론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이자, 시인이라는 그의 이력과 목사인 내가 게임이 되나 싶어 자위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편에 서 있다는 나로서는 완전히 K.O 패를 당한 심정이다. 아주 오래 전 법정이 읽은 책들을 소개한 책을 보다가 너무 창피하여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년 간, 타종교의 승려보다 목사가 못하면 되겠는가 싶어 오기로 읽었던 약 200여권의 책들이 지금은 내게 너무 소중한 지성적 자양분이 되었다. 책을 덮으며 그 오기를 다시 발동하고 싶어졌다. 이정일 작가에게 대들기 위해 2021년은 그가 소개한 인문학들을 따라잡기로 했다. 

오늘 어설프지만 북 리뷰를 남기도록 나의 독서 본능을 자극한 이정일의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은 2020년 독서 목록 탑 10의 2위에 올려놓았다. 또 한 명의 글벗을 주 안에서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흥분된다. 저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나를 불질러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