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2024-06-11 09:5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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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월터 브루그만
ㆍ출판사 IVP
ㆍ작성일 2020-12-09 23:30:10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IVP 간) 를 읽고


기도원에 올라와 있다. 1년에 두 번 갖는 그 두 번째를 위해서다. 전반기는 쉼이 목적인 반면, 후반기 기도원 행은 일이 목적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12월 결산을 한다. 더불어 개척하면서 세운 원칙 중에 하나인 예산을 세우지 않는 목회가 정착되어 목사가 재정적인 그 무언가를 해 내야 하는 부담감도 없는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하지만 금년 하반기 기도원 행은 실로 마음이 무겁고 또 무거운 상태에서 입소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기에 말이다.
펜데믹의 절정기에 오른 기도원 역시 사람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철저한 거리두기가 한 몫을 했겠지만, 그보다 마음의 거리들이 그만큼 더 멀어져 보이는 착시 현상 때문에 더 을씨년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13번째 맞는 사무총회를 준비하는 일이 나에게 맡겨진 기도원 행 사역의 목적이다. 사무총회 개회사를 쓰면서 느꼈다. 2020년이 기적이었고, 은혜였음을. 아무도 없는 채플에 들어가 깊은 호흡을 하며 주군과 소통하는 일이 벅차고 행복했지만, 본 책에서 브루그만 말한 대로 ‘미래 없는 탄식’(p,141)에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더 아프고 심각한 것이 ‘탄식 없는 미래’(p,142)라는 소망조차를 갖지 않을까봐 몹시 두려웠다.
기도원에 올라오면서 세 권의 책을 가지고 올라왔다. 친구 교수인 차준희 교수가 열이 오를 정도로 수고한 노작인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 (성서유니온 간)와 췌장암 투병을 하며 생의 가장 지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뉴욕 리디머 교회를 세운 팀 켈러가 쓴 ‘고통에 답하다. (원제가 더 절절하다.: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두란노 간) 그리고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 (IVP 간)다.
첫 번째 책은 책값을 지불(친구는 언제나 책을 보내주고 서평을 쓰라고 압박한다. 무섭다.)하기 위해서고, 나머지 두 책은 코로나 19로 만신창이가 된 2020년을 보낸 뒤 끝에 목사가 발언해야 하는 지성적, 신학적 ‘포스트 코로나 19’의 목양의 틀을 어느 정도 그리기 위해서다.
브루그만은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아 언제나 그의 신작 글은 독서 사냥감이다. 그리고 그 사냥을 마친 뒤에는 필자는 언제나 대단히 흡족한 수확에 늘 기뻐했다. 이 얇은 책도 예외가 아니었다. 7장으로 되어 있는 브루그만이 진행한 구약성서 텍스트 연구는 펜데믹 즉 전염병 재앙으로 멍들어 있는 나와 너에게 대단히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필자를 심쿵 하게 한 대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코로나 19를 일으키신 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지만, 복음의 하나님이 그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위기 안에, 그와 함께 그 아래에 계심을 신뢰할 수는 있다. 종종 그러시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멈추고 오만을 억제하는 어려운 작업을 위해 감추어진 방법으로 이 위기 한 가운데에 계실 것이다.” (125.)
이것을 전제한 저자는 코로나 19가 던진 경보음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적시했다.(126)
① 이제 우리는 과학 기술을 확신하던 절대적인 세상이 계산을 초월하는 신비에 직면해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있다.
② 우리는 우리의 막대한 힘이 설명을 초월하는 위협의 순간을 막아낼 수 없음을 보고 있다.
③ 우리는 우리의 넘치는 부가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음을 보고 있다.

100%뜨겁게 동의한다, 저자는 오늘을 통치하는 세속화의 노도(怒濤)들이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하심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2020년 한 해 정말 우울한 모드를 일거에 날리는 통쾌함의 서사였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를 소개한 저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복음의 하나님은 우리의 지나친 야망을 제한하고 억제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새 일을 행하고 계신다. 아마도 우리는 이웃과 함께 하는 새로운 정상(new neighborly normal)에 다가서고 있다.” (126)
필자는 하나님의 새 일에 천착하고 싶다. 코로나 19 이후에 주목하고 또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일하실 새 일이다. 그 일을 소망하고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2020년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것에 대한 보상이지 않을까 싶다.
시편 77편에서 ‘나’에서 ‘당신’을 솎아낸 저자는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다. 77편의 시인은 1-6절까지 자신을 주체로 여기고 삼았다. 하지만 7-9절에 기록된 수사 의문문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신실(헤세드), 은혜(하난), 긍휼(라함)임을 깊이 인지한 시인은 12절 이후부터 ‘나’는 사라지고 14-20절 주체를 ‘당신’으로 바꾼다. 저자는 시인의 이런 의도적 변화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긴다.
“이 순간이 바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는 복음 선포의 시간이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달라지시는 세계 안에서 살아갈지, 아니면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모든 것의 중심에 우리를 붙들어 두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 책을 추천한 브루그만의 제자인 랍비 나훔 워드-레브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파한다.
“브루그만은 현재의 재난에 직면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방향 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곧 보잘 것 없는 자아(the small self)로부터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더 위대한 자아(the larger Self)로의 전환이다.”(12)
그렇다. 코로나 19는 ‘나’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는 기형적 신앙의 틀을 ‘하나님’ 중심으로 일거수일투족 해석하는 정상의 틀로 변화시키는 촉매제일 수 있다. 사고의 전환은 평시에 안전할 때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위기의 순간, 두려울 때 일어나기에 말이다.
“이제 지난 날로 되돌아가는 길은 없다.” (10)
앞에서 언급한 랍비 워드-레브의 일갈이다.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부분적이라 함은 혹 되돌아갈 수는 있어도 그 되돌아감의 필드는 이전의 일상이 아님을 필자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해서 많이 아리고 아리다.
팀 켈러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부정적인 생각을 쫒아내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평강은 부정적인 생각들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시작한다.”(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두란노 간,471.)
기막힌 성찰이다, 코로나 19와의 사투가 진행형이다. 그래서 아직은 전투 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레미야의 노래를 등장시킨다. 예레미야 33:10-11절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집요하고 타협하지 않는 희망을 붙들자. (중략) 전염병 가운데에서도 끊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헤세드를 증언하자.”(80-81)
그렇게 될 때 예레미야의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여백을 남긴다. 
이 책의 제목은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이다. 

2021년은 다시 춤추고 싶다. 교우들과 어깨동무 하면서 노래 부르고 싶다. 그러나 남겨진 교훈 없는 춤추기는 재앙일 뿐, 복이 아님을 알자. 브루그만에게서 또 한 수 배웠다. 치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