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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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비아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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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1-15 10:4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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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모호한 삶 앞에서’(비아토르 간, 2020)를 읽고 지난 화요일, 섬기는 교회의 70세 이상 되신 어르신 교우들 14가정을 심방했다. 문 밖 심방이었다. 준비해 가지고 간 쿠키와 간식거리들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문밖으로 나오는 지체들을 위로하며 건넸다. 지난 2개월 동안 교회 예배당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는 년 초 신례 교례를 겸한 어르신 심방을 그렇게 감당했다.
“사모님, 이제 확진자가 없는데 교회 나가면 안 될까요?”
80세가 다 된 권사님이 담임목사의 강복기도가 끝나고 돌아설 때 아내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던진 말이다. 당황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 내가 나섰다. “권사님, 확진자가 요 며칠 사이에 발생하고 있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저도 교우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요. 권사님, 이번 주에 정부에서 뭔가 새로운 방역지침이 내려올 것 같아요. 너무 안타깝지만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이후에 안전하게 교회에서 만나요.” 문밖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마디를 내게 던진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아요!” 왜 아니 그러겠나 싶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간청하는 신자에게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말하는 당사자가 목사요, 사모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막힘을 해석해야 하나! 그것도 1년 넘게 해석해야 하는 것 때문에 이제는 완전 그로기 상태다. 客說했다. 작년 연말에 이 책(모호한 삶 앞에서)을 들고 읽으면서 현장 목회자인 김기석 목사가 펼친 한 지역교회를 맡은 청지기로서 감내해야 하는 코로나 19 상황 하에서의 너덜너덜해진 마음의 토로들을 읽다가 공감의 위로를 받았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고사목(枯死木)밖에 없다지 않습니까?”(p,263)
이제 1년을 넘어 2년째로 접어든 펜데믹의 거대한 습격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아우성으로 폭발하기 직전이기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요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런 요동과 흔들림은 어찌 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심리적 기저를 총동원한 defence mechanism의 작동일 수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고사목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와 다른 점이 보였다. “공감은 하되 냉정을 잃지 않으려는 기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김 목사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버거운 작은 자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본서에서 코로나 19로 인해 급격히 변화된 목회 임상에 대한 낯섦,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세간에 의해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고, 상종하지 못할 광신적 집단으로 각하 몰아침을 당하고 있는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지켜야 마지노선적인 행동의 교훈을 남긴다. 아, 물론 극단적 수구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이 김 목사의 이런 점잖은 충고를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을 알지만 필자는 마음에 새겼다.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을 뿐, ‘예수적 존재’가 되려는 게을리 할 때 우리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p,18) “사랑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p,48)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또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p,51)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타자가 누군가? 그리고 그 타자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존재는 또 무엇인가? 어렵지 않았다. 왜? 교회가 지금 펜데믹의 고통 속에 있는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일체의 타자들을 환대하여 그들을 ‘타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이 땅의 유일한 존재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김현경도 맥을 같이 했다. “인간을 한 명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를 다른 인간들과 구별할 수 없게 하는 그 무엇도 아니며, 그를 특정한 인간(tel homme)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un homme)이 되도록 만드는 그 무엇을 행하는 것인데 그 무엇이 바로 인격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p,115) 노던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스캇 맥나이트도 본인의 걸작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포용이란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세상을 감싸 안는 것”(스캇 맥나이트,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IVP,p,196.) 교회가 지금 직시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전과 선이다.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증언하려면 교회 밖에 있는 타자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펜데믹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타자들을 감싸 안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 삶의 대강령이기에 행해야 한다. 전 아무개, 안 아무개, 손 아무개가 지금 한국교회를 사수하는 목사로 각인되고 있다. 그들이 교회를 지키고 사수하겠다는 일념이 성취될 때,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단하는 것은 필자가 보는 관점에서는 거의 재앙이다. 신자 없는 교회, 누구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 교회, 미래가 사라진 교회, 그리고 가장 큰 참담함은 조백헌이 세운 당신들의 천국으로 전락할 교회가 보이는 괴로움이다. 1월 15일자 국민일보 미션 란에 교회 청년들에게 물었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당신은 교회가 주장하는 대면 예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10명 중 9명이 답했다. “슬프고 화가 난다.” 필자도 현장 목회자다. 대면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교회 예배당에 웃음꽃이 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목사다. 제천에 밀어 닥친 작년 11월의 코로나 공포는 인구 140,000명의 소도시를 잿빛도시, 유령도시로 만들었다. 공포에 떨고 있는 신자들의 안전과 평강을 위해 선제적 조치로 교회 예배당을 닫은 지 이제 2개월을 육박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목사의 무력감은 나의 神魂心을 타격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현재진행이다. 더 두려운 것은 코로나 19 이후다. 어떻게 사역해야 하나! 고통의 터널이 아니라 동굴에 갇힌 느낌이다. 그러다 작년 본서를 읽으며 이 구절에 무릎을 쳤다. “하나의 교회 문이 닫히자 수많은 가정 교회가 탄생했다.” (p,98.) 理想이라도 그런 교회들을 만들어 가야겠다. 만들어가련다. 그게 코로나 19를 생에 만난 목사의 또 다른 사명이리라. 섬기는 교회를 2021년에는 all-line 교회로 탈바꿈한다고 사무총회 개회사에서 선포했다. 지역 교회에서의 전면적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가정 교회를 살려보려고 한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광야는 강인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광야는 편리와 풍요로움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다.”(p,121) 지금이 한국교회의 광야 체험기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광야 신학이 필요한 때다. 종교적 거품들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다. 남은 자로 설 수 있는 운명적 기회다.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저자의 직격탄을 맞아 보자.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문제로 여기고, 자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p,177) 문득 패러디가 하고 싶어졌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를 문제로 여기고, 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글에 대하여 아마도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는 자들은 필자를 심정적으로 공격하고 싶을 것이다. 공격하면 백번 천 번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철회하고 싶지 않다. 왜? 나도 교회를 그들만큼 너무나 사랑하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글이 또 길어졌다. 이제는 글 길게 쓴다는 야단맞기도 지쳐서 중략, 하략하고 저자가 남긴 마지막 한 문장을 나누려고 한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으로 미처 다 파악할 수 없지만, 몰상식을 신앙으로 포장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신 건전한 이성을 활용하는 것이 책임 있는 신앙인의 태도다.” (p,240) 근래, 나 같은 목사를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과 다름없는 목사라고 누군가가 정의한 것을 보았다. 아프지만 또 그렇게 판단당하면 당하리라! 괜찮다. 아프지만 그렇게라도 필자를 공격하면 당해 주리라. 그러나 240p에서 말한 저자의 일침은 간직하련다. 몇 년 전, 필자가 책을 출간하면서 이런 논지의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상식이 기적이 되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다.” 나는 정말로 교회와 목사와 신자들이 상식이 있는 사람과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한 손내밈을 완전히 거두는 절망이 오기 전에. 유대교 랍비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갈파한 이 문장은 필자의 심장 한 복판에 새겨져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being)를 닮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doing)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197.) 내 사랑하는 교회가 주군이신 하나님의 행위를 닮는 공동체가 되는 것은 꿈일까! 김기석 목사는 부족한 사람을 또 한 번 채찍질 해주는 글벗 선배다. 선배께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화살 기도해 본다.
쇼팽의 야상곡이 흘러나오는 제천세인 교회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