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저항2024-06-11 09:5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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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오스 기니스
ㆍ출판사 토기장이
ㆍ작성일 2021-02-13 13:07:14

 

오스 기니스의 ‘저항’(토기장이, 2017년)을 읽고


철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호모-데우스’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인 인간’ 혹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도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해서 그는 21세기의 트렌드를 이렇게 거침없이 정의하기도 했다.
“21세기 인류 기획은 신성을 달성하는 것(attaining divinity)이다.”(박일준, “인공지능시대, 인간을 묻다”, 동연, 129.)
이 정도면 신-바벨탑의 절정시기라고 보아도 전혀 무색하지 않다. 작년 연말, 시무하는 교회에서 협동 사역을 하는 여전도사님에게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목사님이 읽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요. 서평이 기대되어서요.”
무서운(?) 선생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기독교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의 ‘저항’이다. 책을 덮으면서 두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2017년이라는 점과 추천사 인사 중 하나가 릭 워렌이라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전혀 조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한 사건과 한 사람이 이 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나들목 교회를 시무하는 김형국 목사가 이 책을 추천하는 글에 이렇게 썼다.
“세상과 한패가 되기를 은근슬쩍 원하다가 이제 아예 대놓고 욕망하는 오늘날의 교회는 이 책을 멀리해야 한다.”
기막힌 지적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후기 사족으로 이렇게 썼다.
“이 책은 2017년, 성령대부흥회 100주년의 난장 안에서 거의 광기에 가까운 몰아치기로 교회를 제 2의 성령 대부흥의 무대로 올려놓으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내리쳤던 죽비다.”
필자는 책을 읽고 나서 아프지만 냉철하게 세 가지를 추렸다.
⓵ 알기는 하는가? ⓶ 알면서 왜? ⓷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우리는(적어도 예수를 주군으로 믿는 자들) 21세기를 잠식하고 있는 영적 기상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다. 파이로테크놀로지(pyrotechnology)에서 바이오테크놀로지(biotechnology)로,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단일한 현대성에서 다양한 현대성으로 이동(SHIFT)이다. 저자는 이런 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격적으로 이렇게 도발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창조주로서의 인간에 대한 확신으로 대체되었다. (중략) 우리는 이제 인류를 제조할 수 있다.” (p,58.)
이 무시무시한 공격적 도발을 지금 우리는 알기나 하는 것일까?
둘째, 안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속수무책인가에 대한 적절한 답을 내야 한다.
1900년에 세상을 떠난 니체가 근래 세속적 가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앞에서 언급한 SHIFT의 후자들을 위한 부활의 주(?)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니체가 말한 초인(Übermensh)은 인간을 극복한 인간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결코 슈퍼맨 정도의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인간들에게 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인간들 사이에 몰락하기를 원하며, 죽어가면서 그들에게 가장 풍요로운 선물을 주고 싶다. (중략)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다.”(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신문화사, pp,265-266.)
오늘, 기독교-이후의 징조는 초극된 인간,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라면 호모-데우스의 출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런데 왜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일까?
셋째, 저자는 다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를 역설한다. 무엇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초인은 허황된 존재다. 초인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고, 초인이 되고자 하는 시도 자체는 오히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자와 독재자만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자신을 극복할 수 없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은 타락하고 오류투성이나 구원을 받아 그 인생을 예수께 맡기고 그 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를 이기고 영광을 얻은 후 이제 신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획득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죄인을 말한다.” (p,107)
너무 고루한가! 너무 고전적인 상투성으로 여겨지는가!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핵심이라고. 그러므로 이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무기독교(non-christian)의 시대의 슬로건에 주목하자. 이전 크리스텐돔의 시대에는 명목이라도 이것이 구호였다.
“우리는 예수 외에 다른 왕을 모시지 않는다.”
그러나 무기독교의 시대의 슬로건은 역전됐다.
“우리 자신 외에 왕은 없다.”
이런 시대의 서브 슬로건은 언제나 ‘권위를 의심하라’로 점철되었다. 오죽하면 이 슬로건 스티커가 자동차 범퍼의 스티커로 부착되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지금은 사무엘의 시대를 대변하는 듯하다. 사무엘상 8: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 무시무시한 시대의 복판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존 로크는 1689년에 쓴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생각으로라도 하나님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해체된다.” (p,166)
팔자는 이 기가 막힌 문장에서 무시무시한 시대를 살기는 하지만 짜릿한 주존심의 보루적인 기상도를 보았다. 1,000% 동의하며 지지한다.
“어떤 쾌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행복에도 흡족하지 못하고서 하상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뒤쫓아 다니더니, 가련하게도 시시하고 공허한 최후의 시간을 붙잡으려 들다니, 나한테 그리고 완강하게 반항하더니, 결국 시간 앞에 무릎을 꿇고서 백발로 모래 속에 나자빠져 있구나. 시계가 멈추었노라” (괴테, “파우스트”, 열린책들, p,515.)
지난달에 페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날린 이 타격을 읽다가 이런 웃픈 소회가 밀려왔다. 무기력하다 못해 무능력해 영혼까지도 팔면서 초극의 주인공이 되 보려고 했던 파우스트에게 파안대소하며 비아냥거리는 이 글이 오늘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교회공동체의 적나라한 실체와 같다는 아픔 말이다. 필자는 안티들의 공격이 무자비하고 노도와 같아 영적 오기가 분기탱천할 때, 사도행전 17장을 펴서 6절 후반절에 있는 ‘upset the world’ 를 여러 차례 소리 내어 읽는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These men who have upset the world have come here also.)
데살로니가를 복음으로 전복시켰던 바울을 읽으면 눈물이 핑 돈다. 데살로니가의 기득권을 사로잡고 있었던 자들도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자, 시 전체를 복음의 혁명으로 뒤집어 놓았는데도 도무지 타협이 되지 않던 사람, 으름장으로도 속수무책이었던 사람, 그 사람이 바울이었다. 오늘 무기독교의 시대로 패러다임 쉬프트를 할 것을 강력하게 종용받는 비극의 시대, 목사로 부름 받은 나는 이렇게 살고 있나 싶어서 격정과 회한과 부끄러움 때문에 눈자위가 붉어진다.
오스 기니스는 무기독교에 굴복하지 말자고 외친다. 저항하자고 소리친다.
“자유인은 똑바로 선다. 똑바로 걷고, 그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자유인들은 스스로의 존엄과 신념을 고수할 용기가 있다. 무엇이 틀린지를 알고, 틀린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하는 법을 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시고, 그분 앞에서 똑바로 서서 자유로이 걷도록 하신 ‘불가능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p,305) 

나는 불가능한 바로 그 사람인가! 내일 주일, 그 사람으로 강단에 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