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187장: 비둘기같이 온유한 ● 복음성가: 우리에게 향하신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성령께서 기름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1) ● 본문 : 요한복음 16:13 1) 진리의 성령이란 무슨 말인가요? 2)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일어나는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⓵ 누가복음 7:36-50 ⓶ 요한복음 16:13 ⓷ 이재철 목사 ⓸ 열왕기상 19:11-12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1월 사역을 위하여 (사업체 심방, 청년학생 동계 수련회 등등)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김현섭 청년, 황홍일 집사, 장경석 등) 3) 새롭게 편성된 지역 셀 사역의 승리를 위하여(리더와 인턴을 위해) 4) 피택 임직 대상자들의 헌신을 위해 5) 담임목사의 목양적인 영적 리더십을 위해
셀 사역
1) 공 예배 준수하기 2)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 설교요약 제목: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1) 본문: 요한복음 16:13
서론)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 라는 표어의 진의는 대단히 무겁고 부담스럽고 껄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제를 2020년 세인 공동체의 목표로 세운 이유는 단 한 가지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교회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하는 상용어이기에 혼돈스럽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구일 것입니다. 성령이 기름을 부어야 지성이 있는 교회가 된다는 의미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 제기에 답하기 위해 오늘부터 3주 동안 주일 낮 예배 설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적인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교우들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2020년 세인 교회가 세운 표어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끄심을 기대하며 부족한 지성에 대한 견인하심을 요청할 것입니다.
본론)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의 별칭을 제자들에게 14:17절과 15:26절에 이어 본문에서도 “진리의 성령”으로 사용하시며 성령 하나님의 정체를 알려줍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리’(알레데이아스)는 ‘기독교의 본질 혹은 사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내주하심과 일하심은 한 가지의 공통분모를 유지하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필요충족 조건이 바로 ‘본질’이라는 점에서 엇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코 성령 하나님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세상에서 선포하셨던 본질의 내용에서 빗나가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영이십니다. 그렇다면 본질의 내용은 무엇일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3주에 걸쳐서 교우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그 첫 번째의 본질적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일어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진리의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셔서 성령 하나님의 역동이 충만한 교회를 지성적인 교회라고 정의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을 내가 조작하여 일하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시도록 그 분의 인격적인 활동의 여백을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36-50절의 세계로 교우들을 초청하겠습니다. 이 단락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식탁 공동체에 초대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식탁 공동체에 참여하셨습니다. 이 때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창녀 한 명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이 때 시몬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누가복음 7:39) 즉 예수께서 이 여인의 불결함을 알았다면 여인의 행동을 저지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늘 설교자로서 이 예수의 기사를 통해 신년 감사주일에 세인교회에 선포하시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들추어 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교회와 신앙인의 자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원하셨던 것은 은혜를 사람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역의 여백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일하는 방법은 성령 하나님이 선택하십니다. 사도행전적인 역동은 인간이 경험했던 경험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이자 캐리그마 신학자라고 평가하는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아주 의미 있는 갈파를 내놓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신으로 인해 경험하고, 느끼고, 기도하는 그 모든 것들과도 다르다. 그 분은 모든 인간적 불안에 대한 무제한적인 중지이자 모든 인간적 안식에 대한 무제약적인 전진이다.”(프랑크 엘레,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새물결플러스 간,p,68. 재인용)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해 해석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유한한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정도로 더 작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절대로 해석될 수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무한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감정의 표현대로 내 맘대로 움직이는 로봇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에 적용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는 믿음의 여백을 우리는 반드시 내드려야 합니다. 그 내드림이 있을 때 사도행전적인 역동은 오늘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여전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의 역동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내 여백을 내 드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 하나님의 특징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보내신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분은 오직 들은 것만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에 대하여 기막히게 해석한 글 중에 이재철 목사의 해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진리 가운데 있다는 것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이재철, “회복의 신앙”, 홍성사,p,109) 저는 이 목사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합니다. ※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교회와 성도가 성령 하나님께 내드릴 여백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신앙이라고.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엘리야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은 불도, 폭풍도, 지진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조명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말씀하심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11-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주목할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100% 동의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기름 붓는 지성이 있는 교회는 가볍게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듣는 교회이며 듣는 성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캘커타의 성녀인 테레사 수녀에게 찾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기도의 효용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자의 비소 섞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가 이렇게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말하시지 않고 잘 들으십니다. 듣는 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 말을 이해하려면 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결론) 우리 세인교회가 지성적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지성이 있는 교회가 아닌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려면 ① 성령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는 믿음의 여백을 남겨 두고 그 분께 그 여백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② 그 여백은 성령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시는 말씀을 잘 듣는 여백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세인교회는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지성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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