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12월 15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 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 복음성가: 예수 피를 힘입어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이루심
● 본문 : 이사야 9:6-7
1)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봅시다.
⓵ 남 유다가 처한 곤경은 무엇인가요?
⓶ 남 유다의 역사적 반전은 무엇인가요?  

2) 아하스 왕에게 주신 남유다의 보존에 대한 예언은 무엇입니까?
⓵ 이사야 7:14
⓶ 이사야 9:6
⓷ 이사야9:7절 전반절  

3) 위의 예언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⓵ 이사야 9:7절 후반절
⓶ 창세기 17:7-8  

4)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12월 사역을 위하여 (성탄절, 송구영신 예배)
2) 제 12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1월 5일)
3) 2019년 각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4) 환우들을 위해
5) 교회학교의 부흥을 위해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셀 사역

1) 공 예배 준수하기
2)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5) 12월 사역에 적극 동참하기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제목: 이루심
본문: 이사야 9:6-7   

  서론)   
  28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이 순교할 땅에서 끝까지 행했던 그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거침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자신의 역사 끝자락에서 끝까지 붙들었던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모든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붙들었던 것은 ‘그 분의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이 붙들었던 것은 ‘HIS STORY’ 즉 그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 할 때 크로노스의 시간의 분기점을 이렇게 나눕니다. 기원 전(Before Christ)과 기원 후(Anno Domini)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과 그 분의 탄생 이후로. 이것을 전제할 때 역사의 맥을 이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지금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를 이어가는 주체이자 그 역사를 지금도 이루시는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저는 이 역사를 이으셨고, 또 이루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키워드 ‘이루심’에 대하여 조명하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본문 텍스트는 이사야 9장이지만 이 내용의 역사적 흐름은 7장부터 시작됩니다. 예언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대적인 정황은 BC 735년(혹은 733년)으로 추정되는 아람(시리아)과 에브라임(북왕국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남 유다를 침략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은 신흥 강자였던 아시리아 즉 앗수르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자기들의 강력한 힘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그 국가들을 신하 국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굴욕을 당하고 있던 에브라임(북쪽 이스라엘)과 시리아(아람)가 나름 신하국가로서는 힘이 있던 터라 서로 동맹을 맺어 반 앗수르 정책을 폈고, 이 연대에 더 작은 나라였던 남 유다를 강제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왕이었던 아하스는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인 이사야의 지도에 따라 도리어 친 앗수르 정책을 폈기에 동맹한 두 나라에게는 눈에 가시거리였고, 이런 이유로 아하스를 축출하고 꼭두각시 왕인 타벨(두로)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유다를 자기들의 연합 전선에 무조건 굴복하도록 하기 위한 계산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시리아-에브라임이 동맹으로 유다에게 일으킨 주전 735(733)년의 전쟁입니다.
  군사적인 정황으로 보아서는 이 전쟁은 두 나라 연합국에게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유다의 패배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7장이 시작되는 1절의 보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두 동맹국의 참패를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약속하심을 믿지 못하고 대단히 두려워하며 공포에 젖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젖어 있었던 아하스에게 분명한 확신을 주고 담대할 것을 기대하던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유명한 7:14절의 메시지를 예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탄생한 아이에 대하여 임마누엘이라는 이름 말고 또 다른 별칭을 본문에서 4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① 기묘자이자 모사(펠레 요아츠)입니다. 설명하자면 뛰어난 지략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에 이 단어를 ‘wonderful counselor’ 즉 ‘놀라운 상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② 전능하신 하나님(엘 깃보르)입니다. 이 단어 역시 설명하면 ‘위대한 용사 혹은 ’하나님 같은(God-like)’이라는 뜻입니다. ③ 영존하시는 하나님(아비아드)입니다. 설명하면 ‘장수하는 통치자’라는 의미입니다. ④ 평강의 왕(샤르 샬롬)입니다. 설명하면 ‘경제적, 사회적으로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종합해 보십시다. 아하스에게 이렇게 거의 완벽한 지도자가 탄생하게 함으로서 유다를 보존하게 하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예언자를 통해 선포한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본문 7절 전반절을 보면 이 완벽한 지도자를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보증합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그러나 제가 정말로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더 심혈을 기울여 주목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 중요한 메시지를 나누기 위해 7절 후반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짧은 구절이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저를 요동하게 만든 메시지입니다. 적어도 남 유다를 통치하셨던 하나님은 주전 8세기에 격동하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셨다는 것을 이 짧은 구절에서 명확하게 발견합니다.
  어째서 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모세와 다윗에게 한 번도 번복하지 않고 말씀하셨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7:7-8절을 음미해 보십시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택한 백성이 되리라”의 언약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아브라함에게), 또 어떤 때는 쌍방언약(모세와 다윗에게)으로 이 약속을 역사를 통해 재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주체이셨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에 있어서 별로 칭찬할 것이 없었던 아하스에게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 역사의 약속을 지킬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군이 이렇게 하신 것은 그 분의 열정, 열심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제 주목해야 할 오늘 대림절 세 번째의 키워드에 접근하겠습니다. 남 유다 즉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열심은 곧바로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도무지 자격이 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을 구속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은 주군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는 매개로 이루신 은혜가 아기 예수의 탄생이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성취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주시는 영적 레마의 키워드를 받겠습니다.
  ※ 주군이신 예수님은 앞으로도 나를 위해 계획하신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일은 다음과 같은 진정성을 갖고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계획 세우심에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삶이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partnership)이다.”(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연구소,p,97.)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파트너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파트너십을 갖고 당신이 행하신 계획을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버리고, 뒤돌아선 적이 너무 많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식언하시거나 변개하시지 않는 신실하신 주군이십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아하스 왕처럼 분명히 자격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당신의 그 약속을 실천하시기 위해 아하스의 계보를 통해 완전한 왕위를 이을 아기를 탄생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주군이시자 기묘자이시며 모사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요, 평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다시 이 땅에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 분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실하신 약속을 이루실 아기 예수를 대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영국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담아야 할 말을 기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십자가 중심의 자신감, 즉 오만함과 정 반대인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과제를 시작해야 한다. 그 자신감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을 전제한다. 오직 세상과 공유될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가 방향감각을 잃지 않게 한다. 이 일의 모형은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의 헌신적 사랑이다.” (톰 라이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IVP, 2016,p,280.)
  이 글을 읽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제 노트에 메모해 놓은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세상과 공유될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 공유하는 가치라는 톰 라이트의 말이 가슴을 쳤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의 가치만이 저와 여러분이 걸어가는 방향 감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은혜라는 그의 갈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께서 깜(?)도 안 되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실하심이 성육신을 통해 이루어졌고, 또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이 주님이 이미 세워놓으신 신앙의 바른 방향에서 이탈하지 말고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체의 것을 전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림절 세 번째 주간, 나를 위해 이루신 그 은혜를 자국을 나도 새기며 살아가는 귀한 절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