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냉장고를 가끔 정리할 때, 생각지 않았던 음식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때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찬송가 98장: 예수님 오소서 ● 복음성가: 부서져야 하리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자기 비움 ● 본문 : 히브리서 12:2-3 1)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⓵ 다음 성구에서 설교의 중심이 되었던 단어들을 찾아보고 그 의미를 나누어봅시다. -히브리서 12:2-3 -요한복음 1:14 -빌립보서 2:6-8 ⓶ 위의 말씀들을 종합한다면 어떤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나요? |
2) 말씀의 부재로 인한 상태와 말씀으로 자기를 성찰할 때를 비교해봅시다. ⓵ 사람들이 자기 관리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서론) ⓶ 우리(사사기 21:25)의 상태는 어떠하며, 우리의 상태를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약 1:23-25) ⓷ 위와 같이 말씀으로 자기를 성찰한 자들은 자기 비움으로 반응합니다. 자기를 비우려면 반드시 해야하는 영적 자세는 무엇입니까?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12월 사역을 위하여 (성탄절, 송구영신 예배) 2) 제 12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1월 5일) 3) 2019년 각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4) 환우들을 위해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셀 사역
1) 공 예배 준수하기 2)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 요약 제목: 자기 비움 (대림절 첫 길목에서) 본문: 히브리서 12:2-3
서론) 지난 주간, 인기 연예인으로 살던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녀를 향한 참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세간에 전해졌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로서 세상이 아프게 보는 시각과 다른 한 편의 영적인 시각과 여백을 진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현직에서 세속적 물결과 맞서야 하는 목사이기에 아프지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저는 첫 번째 졸저인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에서 소설가 장강명 작가가 쓴 ‘한국이 싫어서’에 대한 리뷰 글을 실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의 리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계나를 동의한다고 적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계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나라가 계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이강덕, “행복한 글 여행”,p,170.) 그러나 반면, 또 하나 주인공 계나의 삶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도 분명히 했습니다. ⓵ 물질적인 만족을 이루면 자기에게 행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착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⓶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성윤리의 일탈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관리를 실패한 것에 대하여 너그럽게 대하는 시대가 될 때 앞으로의 미래는 더 암담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자기 관리에 실패할까요? 사람들이 자기관리에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작금은 사사시대의 속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해석을 전제할 때 오늘부터 시작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론)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행위에 대하여 연이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참다’(휘포메노)입니다. ‘휘포메노’는 원래의 의미가 ‘밑에 머무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영어단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가장 가까운 단어가 ‘understand’가 아닐까 싶은 단어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말씀으로 주님이 체화된 이 주님의 사역을 가리켜 신학은 이것을 성육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사건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위해 자신을 비하하신 사건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자기를 낮추신 일대 사건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알았기에 이렇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비밀을 이렇게 알렸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을 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이 갖고 계셨던 참 많은 것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자기를 낮추셔야 했습니다. 더불어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십자가형 이라는 부끄러움의 극치를 견뎌내셔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거역한 자들의 배신도 견뎌내셔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제시한 히브리서와 빌립보서를 종합한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다시 되새겨보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주시는 가장 적절한 키워드가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 주님의 자기 비우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 첫 주간, 우리들이 새겨야 하는 주님의 행동하심이 자기 비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신적 행위였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등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절에 등장하는 단어 ‘동등 됨’ 은 헬라어 ‘이소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똑같다’는 즉 ‘eaqul’의 의미입니다.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기운 상태가 아니라 같은 평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가 ‘이소스’입니다. 다시 이 단어의 의미를 설교에 적용한다면 주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그 십자가의 치욕이라는 것을 당하시면서 그 고통을 굳이 참으실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는 하나님과 동등 된 권위를 갖고 계셨다는 공식이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그 권리를 버리셨다는 말은 그 분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행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의 자기 비우심은 곧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방법을 여셨고,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 구원의 은혜를 먼저 받은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왜 사사 시대의 후편이라고 담임목사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단합니까? 우리가 살펴본 사사시대의 형편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했다는 기록은 오늘 보아도 의미심장합니다. 왜 의미심장합니까?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시대의 결과물임을 사사기 역사가가 사사기를 끝맺는 절에서 고발한 것입니다. 자기의 소견이 옳다는 것에서 물러설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 본능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막 무지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1:23-25절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거울이 하는 역할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얼굴을 반사하여 비쳐 보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양을 반듯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유비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 기자의 도움으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막 무지한 나를 성찰하여 나를 올곧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 거울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지 않으면 내가 지근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비움은 말씀에 자기를 비출 때만 가능한 영적 행위입니다. 말씀의 조명을 받을 때만 가능한 자기 비움은 대림절의 키워드입니다. 다시 말해 대림절은 주님이 자기를 비우신 것처럼 우리도 나를 비우는 절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나를 비우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영적 반응을 새기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본문 2절 전반절로 돌아갑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할 것도 없는 절대적인 명제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자기를 비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영적 자세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계산과 이해타산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볼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나를 비워가는 삶에 대한 아주 선명한 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주군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며 동시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체이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영적 팁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언제나 부족한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나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를 바라볼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대중가요 가수가 ‘아모르파티’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러서 적지 않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부르는 이 노래를 우연히 방송에서 곁눈질하면서 본 적이 있습니다. 분위기는 말 그대로 ‘막 노는 것’의 분위기였습니다. 문자 자체의 의미가 ‘운명을 즐겨라’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가볍게 노는 느낌이 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아모르파티’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막 살면서 인생을 즐기라고 만들어낸 말이 아님을 아는 저는 못내 씁쓸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운명애(運命愛)’ 라고 번역되는 ‘아모르파티’라는 말을 니체가 언급한 이유는 도리어 삶을 막 되먹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사랑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내 인생을 사랑하려면 후회하지 않는 삶의 자국을 남겨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후회하지 않는 스티그마를 남겨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 흔적은 주군이신 예수께서 남기셨던 자기 비움이라는 흔적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공동체의 지체 여러분 ! 주군을 바라보십시다. 믿음을 주시는 것은 물론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자기를 온전하게 비우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나의 자기애를 비워내는 대림절기를 보내십시다. 대림절기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기 비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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