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말할 때 “적정한 선”에서 처리 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처리해도 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또 적당히 처리하지 않아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 복음성가: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언제나 두 부류는 존재했습니다. ● 본문 : 사도행전 17:1-9 1) 본문 해석을 통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봅시다. 2) 위에서 살핀 두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요약지에 기록된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나누어 봅시다. ⓵ 첫 번째 부류를 통해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⓶ 두 번째 부류를 통해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24일 홈 커밍 데이 축제가 승리할 수 있도록 2) 2019년 각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3) 입원 중인 환우들을 위해 4)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대학 입시의 관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대학원 강의, 후반기 사역의 승리)
셀 사역
1) 24일 홈 커밍 데이 축제 준비하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제목: 언제나 두 부류는 존재했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17:1-9
서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마이클 호튼 교수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가 처음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저는 개인적으로 열광했습니다. 왜냐하면 ‘긍정의 힘’, ‘잘 되는 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무엇이 복음인지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죄악이 교회에서 판을 칠 때 당시 한국교회를 향하여 정신이 번쩍 나게 했던 핵폭탄과 같았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의 한 마디 충고를 들어보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당장 절박한 필요들을 채워 나아가는 것에 급급하여 진정한 필요들을 실제적으로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포는 덮는다.”(p,307) 호튼 교수의 지적을 한 예를 들어 조금 쉽게 풀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는 젊은 목사 시절, 학위 공부에 집중하다가 육체적으로 지병을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편두통입니다. 해서 30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40 중반까지 편두통으로 인해 적지 않은 삶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정신과 전문의를 통해 처방 받은 것이 ‘카페고트’라는 약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약물이 중독성 약물이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물의 위험을 뒤늦게 깨달은 지는 중독 이후였습니다. 당시 해군 군의관으로 재직하던 신앙 좋은 신경과 전문의를 만났고 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카페고트의 약물 중독에서 벗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약 한 달 동안의 고통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했다는 점입니다. 카페고트는 저를 영원히 죽이는 약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약물만 있으면 죽어도 좋겠다는 심정으로 그 약물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결국 그 고통의 시간을 잘 버텨서 지금도 가끔 약한 편두통으로 고생을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치유된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카페고트’를 찾았던 것은 마이클 호튼 교수의 말대로 당장의 절박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하고 유일한 것을 덮어버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두 종류의 부류가 존재합니다. ① 내가 원하는 것이 절박한 필요라고 주장하는 부류입니다. ② 반면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필요에 주목하는 부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두 부류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심지어 내일까지도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 상존한다는 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제 2차 전도여행의 과정이었던 데살로니가 사역에 관한 보고입니다. 본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항상 행하던 대로 유대 율법을 강론하며 가르치는 장소인 빌립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니 이곳에 3주 동안을 거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그의 일행과 더불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고 바울과 실라의 말을 인정하였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에 거주하고 있던 경건한 헬라인들이 복음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의 상류층에 있던 귀부인들도 역시 바울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은 바울을 따르는 믿음의 진보를 나타냈습니다. 이들 부류가 누구입니까? 앞서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주님의 원하시는 필요를 알아차리고 그 필요를 추구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바울을 핍박하는 부정적인 부류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여타 다른 지방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들 역시 바울을 아주 강하게 핍박하고 거부하는 부류들이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과 실라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수색합니다. 하지만 이미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이라는 형제를 붙잡아 이 사람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도왔다는 누명을 씌워 그들을 체포합니다. 졸지에 이런 고난을 당항 야손과 그의 지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보석금을 내고 방면되었다고 누가는 본문에서 보고합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1) 진리에 눈감은 부류들에 대하여 반면교사 삼기입니다. 본문 5절을 집요하게 다시 한 번 나누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추측됩니다. 동시에 이들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회당을 맡아 주관할 정도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 종교에 대하여 빠삭한 사람들입니다. 헌데 이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직접적인 거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한 단어를 주석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반기를 든 이유를 누가는 ‘시기하여’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단어 ‘젤로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5절에서 이 단어를 ‘시기하여’라고 번역했지만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열심을 내다.’, ‘열심을 품다.’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열심을 품는 자가 왜 시기합니까? 그것도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인 그리스 사람(마케도냐)이 아닌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이 왜 바울을 시기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약관화합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을 직시하십시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3주 동안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의 기록을 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풀이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렇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감동의 메시지 위에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들은 제 2차 전도여행의 시기에 데살로니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도 존재한다는 것에 아연실색합니다. 이 부류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2) 진리에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는 부류에 대하여 진면교사 삼기입니다. 본문 4절을 읽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바울이 선포한 예수의 케리그마를 들었던 회당 공동체 안에 있었던 헬라인 큰 무리, 그리고 귀부인들이 변화되었음을 누가가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은 헬라파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이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변화된 자들을 소개하는 이 구절에서 이들의 신분까지 묘사했습니다. 경건한 자, 그리고 귀부인이라고 적시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표현을 했지만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통칭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큰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의 필요성에 반응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자들은 지위고하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 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여백을 독자인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는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었던 익명의 예비 된 영혼들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아마도 분명히 이들을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교회로 성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살전 1:3-8 참조).
결론) 언제나 두 부류들은 존재했습니다. 진리에 눈감은 부류와 진리에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는 부류입니다. 두 부류는 데살로니가에도 존재하였고, 오늘 우리 세인 교회도 존재합니다. 지난 주간, 지전도사가 대화중에 저에게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사역하는 로컬 처치에 신자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귀가 화려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듣다가 뭔가 감춘 것이 드러난 것 같아 얼굴이 화끈 거렸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심장이 화려한 교회인가? 아니면 지 전도사 말대로 귀가 화려한 교회인가? 마이클 호튼의 벼락을 하나 더 전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예수의 이미지에 정서적으로 기생하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으로 변질되고 있다. 최근 몇 십 년간, 바울이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롬9:33),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라 말한 이 메시지를 전할 배짱이 충분히 있음을 나타내지 못했다.”(그리스도 없는 기독교,p,33.) 이강덕 목사도 절치부심하게 만드는 호튼의 벼락이었습니다. 언제나 두 부류들은 여전히 있어 왔기에 그냥 담임목사는 이렇게 전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있으니까’ 전혀 변화가 없는 돌덩어리와 바위를 향하여 낙수하는 물방울은 떨어뜨리는 사역은 임기 동안 감당하기로 말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예배하는 우리 세인 교회 성도들 중에 그래도 ‘어떤 사람’이 오늘도 생겨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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