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나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나눔을 통해 어떤 유익을 경험하시나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 - 413장 ● 복음성가: 이 땅위에 오신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진짜 이유 ● 본문 : 갈라디아서 6:6 1) 본문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누구를 가리키나요? ⓵ 본문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요?(NIV 번역 참고). ⓶ 우리에게 적용하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요? ➂ 본문 6절의 배경 본문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바울이 권고한 내용을 설명해봅시다.(4장 14절과 4장 16-20절 비교) |
2) 위에서 나타난 바울의 권고를 통하여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⓵ 첫 번째는 무엇인지 설명해봅시다. ⓶ 두 번째는 무엇인지 설명해봅시다.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한빛 농장에 어려움이 없도록 (이 땅의 모든 축산업이 어렵지 않도록) 2) 피선교지를 위하여 (군산 반석교회, 대전 수정교회 중보) 3) 환우들을 위해 중보 하되 암 투병 중에 있는 황홍일 집사님의 치유를 위하여 4) 10월 사역을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와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가을 목장 대심방 준비하기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요약 본문 : 갈라디아서 6:6 제목 : 진짜 이유
서론)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가 누구인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바른 나라’라고 우기는 그런 삶의 정황이 정말로 ‘똑바른 나라’가 아니라 도리어 ‘거꾸로 나라’가 진짜로 ‘똑바른 나라’라고 믿고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상당히 불편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가 전혀 똑바르지 않은 이 세상의 모양새를 모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두지휘하며 똑바르지 않은 그 셈법을 이끌어 가는 온상이 되었다는 기막힘이 도무지 용납되지 않습니다. 사사 시대 전반에 드리웠던 흑암의 그림자가 무엇이었습니까? 사사기 21:25절 후반절에 답이 있습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옳지 않아도 옳다고 우기며 막 산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성경의 사사 시대의 캄캄함을 뛰어 넘는 신 사사 시대라고 정의하는데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바로 이 기막힌 시대의 암울한 명제에 맞서 대항하며 사람의 소견이 아닌 하나님의 소견에 부침할 수 있는 공동체가 과연 있을까?”
본론) 본문을 다시 생각하며 읽겠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번역되어 있는 ‘호 가테쿠메노스’ 즉 ‘가르침을 받는 자’는 세속적인 지식을 전수받는 학생을 의미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 단어를 풀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는 자’의 성격을 잘 설명한 영어성경 NIV 번역을 읽어 드리면 ‘말씀 안에서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믿음의 여정으로 들어서기 위해 그리고 또 살아내기 위해 교육을 받는 일체의 신자들을 의미한다는 문구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여기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은 해석일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가르침을 받는 일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역설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렇다면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는 6장에서 뜬금없이 이 부담스러워 보이는 발언을 했을까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자비량 사역자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경험했던 자비량 사역은 바울 스스로에게 대단히 많은 목회적인 소회를 느끼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갈라디아교회에서 경험했던 바울의 아픔을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도착하여 교회를 세웠을 때, 반응은 대단히 귀했습니다. 특히 4:14-15절의 보고는 압권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다음에 나오는 후속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16-20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급반전입니다. 배교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은 이제는 바울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심겨주는 반대자들로 전락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 말을 오늘 현장의 언어로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면을 담당하여 말씀을 먹이고 있는 이강덕 목사를 사랑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속이 보이는 요구라고 마음에 불편함이 있으십니까? 이제부터는 정말로 불편한 부분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슈퍼 메가 처치에 의해 자행된 한국 교회에 행한 자살 행위가 여론에 전해진 뒤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인터넷 상에 올린 가장 많은 댓글은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다음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돈을 믿는 기독교의 사망” 저는 이 질타에 대하여 전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100%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에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음이 참으로 애석하고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강덕 목사를 믿지 말고 예수 잘 믿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렇게 말로 권면한다고 해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체계 구조는 개 교회주의이자 교파, 교단주의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은 회중들의 공의가 통과된 목사를 청빙하여 목회자 중심적인 교회 구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파격적인 변화나 혁명적인 틀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이 체계로 가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이렇게 언급한 것은 결코 상투성이 있는 구습으로의 후퇴가 아니며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방법을 모색하여 교회를 일구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저는 오늘 본문에 제시된 바울의 권고 안에서 두 가지의 내용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가르치는 자가 바르게 가르치도록 성도들이 경계하십시오. 새물결 플러스 출판사 대표인 김요한 목사는 수준 높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4가지의 지침을 이 책에서 내놓고 있습니다. 첫째, 목사가 계속해서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부에 목숨을 걸어 하고, 둘째, 더불어 신자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엄격한 영성 유지가 필요하며, 셋째, 아무리 지적으로, 영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더라도 윤리적인 삶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철저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는 목회 행정가(정치하는 목사가 되지 않도록)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영역에 대하여 목사가 성장하고 있는가를 교우들이 경계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목사가 이 4가지의 영역에서 소홀해지면 압박해야 합니다. 그것은 목회자를 대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좋은 목회자를 만들어가는 동역입니다. 목사가 4가지에 실패하면 교우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2)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예의를 지키십시다. 만에 하나 목사인 제가 가르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된다면 가르치는 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기록된 ‘함께 하라’는 번역에 저는 특별히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코이노네이토’의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교제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소통하고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모든 일에 대하여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도가 목사에게 지원해야 하는 일체의 모든 일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조심스럽게 들추어 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는 일체의 과정을 지원하며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은 상식의 도(道)로 대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었습니다. 목사를 대할 때 상식의 도에서 벗어나는 무례를 범하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아무리 교회 목사로 먹사로 여기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는 참람한 시대이지만, 세인 교회는 세인 교회의 예를 지키는 보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여러분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4가지 사항을 지켜나가는 종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한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은 상식의 예의를 지키는 것임을 명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함께 하는 일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한 대형교회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그 교회와 그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교단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생한 것 같지만, 반대로 한국교회는 무너져 내리는 참담함을 앞으로 더 빠르게 목도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일련의 이 무시무시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고 말하는 남은 자들이 한국교회에는 존재합니다. 그 그루터기 같은 종들과 교회가 존재합니다. 나는 이 교회들로 인해 이 땅의 교회들이 다시 세워져 갈 것을 믿는 목사입니다. 제가 은퇴하기 전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갈 후배 목회자들이 있음을 알기에 그냥 우리 세인교회도 그들과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서로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이 땅의 마지막 소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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