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9월 22일 (넷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좋아하는 것 중에는 부담이 없이 좋은 것도 있지만, 부담스러우면서도 좋은 것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너 성결키 위해 - 420장
● 복음성가: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짐 짊어지기
● 본문 : 갈라디아서 6:1-5
1) 본문 2절에서 말하는 ‘짐’은 무엇입니까?
⓵ ‘짐’이라는 단어 ‘폴리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⓶ 2절에서 ‘짐’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 참고)  

2) 본문 5절에서 말하는 ‘짐’은 무엇입니까?
⓵ 5절에서 말하는 ‘짐’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⓶ 본문 3-4절을 근거로 ‘나에게 주어진 짐에 대해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의미를 찾아봅시다.
➂ 마태복음 3:9을 예로 ‘중심 메시지’를 설명해봅시다.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결론 부분을 참고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도록 합니다.)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한빛 농장에 어려움이 없도록 (이 땅의 모든 축산업이    어렵지 않도록) 
2) 피선교지를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해 중보 하되 암 투병 중에 있는 황홍일    집사님의 치유를 위하여
4) 재능 기부 사역 2번째 승리를 위해 (9월 28일)
5) 군에 있는 자녀와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가을 목장 대심방 준비하기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요약
본문 : 갈라디아서 6:1-5
제목 : 짐 짊어지기 

  서론)
  우리나라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영어로 표기할 때 항상 쓰는 표현법은 ‘senior pastor’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기를 직역하면 ‘나이가 많은 목사’입니다. 미국은 담임목사 표기를 ‘pastor in charge’ 라고 표기합니다. 이 말을 우리나라 말로 직역하면 ‘의무를 가진 목사’ 혹은 ‘짐을 진 목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는 책임을 떠안은 목사입니다. 그래서 짐을 짊어진 목사라는 미국식 표현이 담임목사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해석이라는 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마태복음 11:28-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짐’이라는 헬라어 단어 ‘폴티온’은 문자적으로는 ‘화물, 궤짝’ 같은 말 그대로 ‘짐’이라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영적인 부담’ 혹은 ‘의무’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오늘 본문도 예외는 아닙니다.

  본론)
  본문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 짐을 짊어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짐이 무엇일까요? 답을 본문 1절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울이 말한 어떤 사람이 범한 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배교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잠겼던 어떤 이들이 할례의 유혹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탈락한 뒤 배교한 죄입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 안에는 이런 배교자들이 즐비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2절의 의미는 배교한 자들을 향하여 성령의 8번째 열매인 온유의 마음을 품고 다가서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에 반하여 5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않고 굳건히 예수의 은혜를 사수한 성도 개인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즉 5절의 의미는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적용입니다. 내 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하라는 바울의 주문일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짐에 대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5절의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이 부분은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나름 십자가의 은혜를 사수하며 달려왔던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잘못하면 할례주의자들에게 범할 수 있는 교만을 경계하면서 이렇게 그들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사수한 형제들은 결코 할례주의로 돌아선 배교자를 향하여 무자비하게 범죄자로 낙인을 찍으며 정죄하는 일을 경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당신들은 잘 난 자이고 저들은 버려진 자들이라고 비교하거나 우쭐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내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바울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당부한 바울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결정적으로 이렇게 명령이자 권면을 남긴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다른 사람을 비교 평가하지 말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개인의 영적인 부담을 짊어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바울의 종용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찰스 카우만은 3-4절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적어도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범죄 한 동료에게 쉽사리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울 수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당연히 높이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평가를 하려면 범죄 한 동료를 측정의 표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범죄 한 동료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찰스 카우만, “현대성서주석-갈라디아서”,p,199.)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해석입니다.
  저 역시 설교를 준비하다보니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성경을 통하여 영적 교훈을 삼아야 하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 나에게 엄격해야 하는 짐을 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3:9절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구절의 배경은 세례자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강력한 주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유대의 종교적인 정황은 헤롯 성전을 주축으로 삼는 건물 종교, 산헤드린의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권력 종교라는 참담함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라는 본연의 구약적인 은혜는 사라진지 오래된 때였습니다. 바로 그 때 세례자 요한은 유대의 기득권 종교를 향하여 비수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는 선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벼락을 던졌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영적인 신선함에 민중이 열광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는 자들이 비일비재하자 위기감을 느꼈던 유대 종교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바리새파, 사두개파가 그를 경계하여 유대 광야에 집결한 것을 보고 유대 종교의 폐부에 치명타를 날리는 결정적인 검을 꽂았습니다. 마태복음 3:7-8절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렇게 직격한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품고 있었던 껍데기 신앙의 종교적 위선들을 박살냅니다. 마태복음 3:9절은 압권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유대 종교의 가장 추악한 뒷모습은 출신 배경을 자랑삼는 것이었습니다. 기고만장한 선민 공동체의 교만한 몰골이었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막 살아도,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한 가지의 명목으로 우리만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괴물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치명적인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후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유대 광야에 깔려 있는 이 하찮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선언을 함으로서 유대인들의 버릇없는 종교적 가식을 박살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9절의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선포한 선언을 오늘의 언어로 풀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이런 종교적 이력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런 종교적 캐리어의 능숙한 경력을 갖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많은 신비적, 은사적 경험을 했다. 나는 성경공부도 이만큼 했다. 나는 성경을 백 번 읽었다. 나는 40일 금식기도를 수차례 경험 했다. 나를 우습게 여기지 말고 대우해라. 나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 같은 진골, 성골 출신이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게 자랑거리입니까? 그게 내세울 이력서입니까? 세례자 요한은 오늘 이런 자들을 향하여 그리고 이런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갈무리하며 경고합니다. “다 쓸데없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지금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네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내고 있느냐다. 지금 네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느냐다.” 정말로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열매를 맺고 있는 나입니다. 오늘 이 은혜에 민감하려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나에게 엄격한 것입니다. 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는 물론 우리 세인 교회에 속해 있는 일체의 지체들이 겉멋 든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는 치열함입니다.

  결론)   
  내 짐은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지체의 짐이 있다면 그 짐은 서로 짊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나는 내 신앙의 여행 여정을 철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는 점수가 후해서는 안 됩니다. 야박해야 합니다. 그때 나는 나를 성찰하여 성장할 수 있습니다.
  중세 영성신학의 대가였던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름을 지어 붙일 경우,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뛰어넘는 하나님이시다.” (메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분도 출판사,P,98.) 몇 년 전에 이 글을 만났을 때 참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뛰어 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따르는 하나님의 기막힌 정체성의 표현이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주군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조금만 무엇을 남보다 뛰어나게 하면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는 추악한 존재가 바로 ‘나’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를 바로 보는 짊어짐, 바로 그 짐을 짊어지는 것, 그것만이 내가 선택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인 것을 명심하고 그렇게 겸손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대해 봅니다.